고작 잡문 정도의 글을 끼적이면서 엄숙하다니.
아무래도 좋다. 인생은 진지하거나 경박스럽거나 결말을 지니고 있다.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보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느긋하게 죽음을 바라볼지 모른다. 방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펼쳐 첫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가벼운 파도가 이는 것처럼 흥분했다. 마치 침대에 누워 여자가 욕실에서 물 끼얹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남자처럼 말이다. 그래도 메일을 보내기 위해 메모장을 열었다. 배고픈 사람이 급하게 음식을 욱여넣는 것보다 시장기가 서서히 물러가는 걸 느끼면서 밥을 먹는 게 낫기 때문이다. 식탁 조명의 밝기나 음식의 온기, 국물의 간, 적당한 소음의 주변 환경이 나를 자극하는 허기와 맞물려 세상의 조건을 설명한다. 살아온 나의 행태와 맞지 않는 설정이었는데 차츰 누그러드는 성격을 반영한 거였다. 그래도 곧잘 흥분하거나 불퉁스럽게 화내곤 한다.
설령 책을 덮고 산책을 나가거나 급하게 해치울 일에 시간을 뺏긴다 해도 서두를 건 없다. 내일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깨달음으로 갑자기 내 운명이 달라져도 생각을 잡아끄는 자잘한 부스러기라도 허투이하지 않는 건 사실 생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철사 조각 하나라도 추락하는 낙하산의 고리에 끼워 생명을 조금은 연장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늘에 고인 슬픔이 있기라도 한 듯 이틀째 비가 내렸다. 그것도 철철 슬픔이라니. 이런 천기엔 산불 나라고 기름을 쏟아부어도 젖은 땅은 꿈쩍하지 않으리라. 비 내려도 나오라는 기별 받고 읍사무소에 나갔다. 신입들은 교육장으로 올라가고 선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검열받는 업무일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담당 구역을 한 번 돌라는 실무자의 말을 들었지만 집에 돌아가 파전에 막걸리라도 마신다면 몰라도 빗속에 돌아다닌다면 주민에게 극성이라고 손가락질당할 게 뻔하다. 구 반장 가게서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에 갔다.
아, 이 말은 해야겠다. 이태째 산불감시원에 선발됐다. 남자 셋만 붙고 나머진 서리 맞은 뽕닢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남자 셋 중 하나가 반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 들어온 아줌마들에게 자기 몫의 근무복과 모자를 주는 사람이지만 반장감은 아니다. 호감을 얻으려 노력한 만큼 우유부단한 성격은 정확한 업무의 이해에 혼선을 주었다. 낯 뜨겁고 뻔뻔하게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 말하기는 즐기지만 남의 어려운 처지를 위해 고민하고 앞장서길 주저하고 숨었다. 일테면 교통사고로 결원이 된 자리에 구 반장이 들어왔다. 우리처럼 읍사무소 소속이 아닌 군청 소속이라도 근무 조건은 같아야 하지 않나. 구 반장은 우리처럼 평일에 하루 쉬는 게 아니라 주말 이틀을 쉰다. 수입의 적음도 그렇고 산불 감시의 본래 목적과도 어긋난다. 반장의 위치라면 윗선에게 건의할 수 있는 경우인데 새로 선임된 반장은 구 반장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뒤로 빠진다. 작년엔 혈육처럼 친하게 굴더니 안면을 바꾼다. 사람 행동의 하나하나를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릇이 아니면 국물도 인정도 일상의 사유도 못 채운다. 젠장, 더러운 기분이라도 털어내는 게 낫다.
도서관에 가서 도서를 검색했다. 역시나 없다. 희망도서 구입신청서에 세 권을 써넣었다. 내년 초에는 도착하려나. 대신 신착 도서 중 읽을 만한 책을 담았다. 빗물 묻은 신발 바닥에서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났다. 시골, 시골, 시골 도서관의 가난이다. 서가마다 빛나는 등짝을 꼿꼿이 세우고 책이 꽂혔지만 정작 찾는 책은 꼬리를 감춘다. 신착 도서 코너를 일별 하면 주민의 독서 취향을 대충은 간파한다. 서재 거나 골방에서 책 읽는 사람의 등이 떠오른다. 심심파적이든 분명한 목적의 책 읽기든 책을 읽는 행위는 구도자의 자세와 닮았다. 어떤 날엔 개울에서 큼지막한 사금 알갱이를 발견하듯 내 취향의 책을 신착 서가에서 만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동류의식을 느끼곤 한다. 그런 이는 안 봐도 즐겁다.
문자다.
'시만 파는 시인은 되지 않을'거란 후배의 말. '어차피 인생은 시고 산문이니 자유롭게'하란 문자를 날렸다. 시만 파다니. 십삼 년을 골방에 갇혀 군만두만 먹은 올드 보이가 되려나. 오랜 면벽참선에 무릎이 썩었다는 달마대사는 여인의 가랑이 사이를 무릎으로 기진 않을 거다. 득도한 선승이니 말이다. 시드럽고 시시하고 시덥잖은 시에만 매달릴 순 없다.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기껏 고른 짜장면을 먹는데 옆자리의 사람이 훈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우동 국물을 후루룩 맛나게 마신다면 우동이 먹고 싶을 거다. 그래서 어느 중국집엔 그릇을 반으로 나눠 짬짜면(짬뽕반 짜장면 반)도 팔지 않던가. 비유가 짜장으로 흘렀지만 삶의 욕망은 단순하게 한 곳으로만 모이진 않게 마련이다.
시적인 삶과 산문적인 삶이 따로 있는가. 영혼의 교감과 생의 성찰은 문장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산문을 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 한 줄 한 줄이 살아 펄떡이는 활어 같다. 글에 담긴 의미가 시 정신이고 산문 정신이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다. 안도현은 시 창작교실에서 머리로도 쓰고, 가슴으로도 쓰라고 했지만 사실 '온몸'으로의 글쓰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이름이다. 공허한 사변이나 교양 치레가 아닌 냉철한 이성과 쓰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뜨거운 심장의 피로도 쓰란 얘기다. 그것도 가증스러운 자만심과 그만큼이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그럴듯한 남의 흉내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삶의 단독자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한 거였다. '아직 그러나 타인은 우리 가운데 있다,라고 노래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고대인들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를 발견하기까지, 인류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라는 말도 '나'라는 말에 비하면 무척 상대적이다. 아직 적은 나의 바깥에 있다. 타인을 찾아가는 마지막 여정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내 속에는, 많은 이가 그렇게 쓴 것처럼, 많은 타인이 들어 있다. 그 타인들이 나의 얼굴을 만들고 있다. 나의 얼굴은 타인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끔찍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허수경 시인의 전언이다.
총명한 사람은 이쯤에서 니체의 자유의지를 떠올려도 좋으리라. 일체의 관습과 타성을 거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자유로운 몸과 정신의 의지로써 자신만의 창작에 몰입하는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반열에 드는 경지인 거다. '유명해지고', '돈을 벌고'는 다음의 일이다.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건 세상의 입김과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다.
짧은 편지글이 장황하게 늘어졌다. 비 머츰한 틈에 햇발 비친다. 꾸덕하게 말라가는 무말랭이를 내다 널고 들어온다. 읽을 책은 남았고 시간 넉넉하다. 결핍은 버려도 좋은 날이다. 너와 내가, 우리가 오래도록 손잡은 날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