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감시원 5

by 소인


미수(米壽)인 승내 할머니 헛간 마당에서 선돌 마을을 본다. 대추밭 골이 병풍 같은 산을 등지고 좌우로 퍼진 게 한눈에 보인다. 승내 할머니는 안말에 산다. 안말의 좌우는 한눈에 잡히진 않아도 대신 하늘이 빼꼼히 비친다. 어쨌든 선 자리가 선돌 마을을 개관할 수 있는 최적의 곳인 것만은 틀림없다. 대추밭 골 앞을 지나는 지방국도 사이로 안말 쪽에는 논이, 대추밭 골 방향으론 밭이 자리 잡았다. 논이라고 해야 남도의 너른 들과는 애저녁에 비교 불가다. 산지가 구 할에 가까운 군에서 그나마 논을 볼 수 있는 곳은 대로변이다. 기껏해야 조망하는 직선거리는 일 킬로에 못 미친다. 마을을 통과하는 길만 빼면 골짜기 양켠으로 좁은 부챗살 모양이다.

가을을 거두어 간 빈 논엔 짚 북데기가 드문드문 널렸고 군데군데 소 먹이용 건초가 돌돌 말려 쌓였다. 마른 고추 포기를 뽑아 태웠거나 미라처럼 말라가며 발갛게 변한 병든 고추를 매단 고추밭이 공동묘지 같다. 태운 재가 빈 밭을 구르다 허공에 뜬다. 부지런한 농부는 수확이 끝나자마자 밭을 갈아 쓸어놓은 안방처럼 만들었다. 끝물 콩 타작과 김장할 무 배추 거두는 경운기 소리가 골에서 새 나온다. 오가는 차라고 해야 두 시간마다 지나는 버스 외엔 승용차도 가물에 콩 나듯 지난다. 사람들은 지금 밭에 들어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 김장서껀 마지막 가을을 알뜰히 챙기는 중이다. 흘린 콩 한 알도 기어가 줍고 병든 고추도 잘라 멀쩡한 놈은 방아 찧는 데 던진다. 입에 들어가 탈 나지 않는 거라면 아껴 쓰고 모으며 아이들을 길렀다. 흠만 나도 버리고 새 걸 사는 세상에 고물 난 것의 소중함은 험한 세월 산 사람이 더 잘 안다.

선돌 마을의 임상(林相)은 소나무가 대종이다. 낙엽송 조림지는 눈에 띄지 않고 나머지 임연부(林緣部)엔 참나무류와 아카시나무 등 잡목이 자란다. 누에 치는 집은 사라졌지만 뽕나무의 생명력은 끈질겨서 밭터서리나 뒤란 후미진 곳에서도 뽕나무는 기세 좋게 자란다. 두어 해만 한눈팔면 키가 두 길 넘게 자란다. 초여름 하얀 털 가루가 날리는 진딧물이 끼면 뽕나무는 천덕꾸러기로 변해 농부의 낫질을 받는다. 승내 할머니 뒤란은 동네 산으로 이어지는데 속없는 등칡이 숨 가쁘게 내려오다 콘크리트 마당에 막혔다. 분을 이기지 못한 등칡의 이파리가 노르께하다. 넘볼 걸 넘봐야지. 대추밭 골 앞을 지나는 지방국도 가에는 나무 업자가 심어놓은 단풍나무가 핏빛보다 붉은색을 내뿜는 중이다. 솔숲 사이사이 상수리나무 단풍이 노랗게 숲을 태우고 몇 낱 남은 은행나무 이파리가 설핏 기운 햇살에 떤다.

읍내 쪽에서 대추밭 골 앞길을 자전거가 지나간다. 발을 젓지 않으면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경로당 세 갈래 길에서 안말로 방향을 튼다. 가까워지니 여자인 걸 알겠다. 초로의 아줌마가 이번엔 논 건넛길로 올라간다. 눈을 떼지 않고 동작을 보니 전기자전거다. 오토바이 엔진음도 없고 페달링 하는 다리의 피로도 없는 무음 자가용이다. 마치 정물화의 가운데를 비행하는 파리처럼 길 따라 곡선을 그리며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공기가 선득해졌다.
정말이지 소리가 없는 시골 마을의 정적은 적요해서 심심하다. 개도 제 소리가 무안한 지 짖다 금세 멈춘다. 밭에 선 트랙터. 굳게 다문 저장고의 철문. 노인의 손길이 쓸고 간 텅 빈 하우스 비닐이 팔랑거린다. 적막한 공기가 귓속에 머무니 모기소리가 나는 것 같다. 환청이다. 오래전 광산의 막장에서 칠흑의 어둠을 경험했다. 폐석이 실린 광차를 케이지에 태워 올려 보내고 혼자 남았다. 동료가 광차를 비우고 다시 내려오기까지는 이십여 분. 그때까지 휴식이다. 장갑을 뒤집어 물기를 짜거나 담배를 굽거나 내 시간이다. 헬멧의 케프 등을 껐다. 칠흑이다. 손을 휘저어 앞의 무엇이라도 감각 외엔 분간할 수 없는 암흑. 빛이 사멸한 무명의 한복판이다. 귀담으니 위쪽 몇 편인가에서 발파음이 들렸는데 마치 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공깃돌을 시멘트 바닥에 던지는 소리는 꿈의 대화처럼 가물댔다. 지구의 시원을 더듬는 심정이 이럴까. 태초에 어둠에서 빛을 만든 이가 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그'라는 삼인칭은 과연 합당한가. 나는 어찌해서 막장의 칠흑을 더듬는가. 물음과 답이 착종된 현실에서 나의 행위란 유의미한가.

일상을 밀어 올리는 관성. 거창하게 말해서 생명활동이란 먹고사는 과정이다. 먹고 먹이는 게 동물의 일이다. 수목도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먹인다. 인간은 밥벌이 외의 도락을 구하는 존재다. 욕망의 대상은 천차만별이지만 요즘은 대체로 한 군데로 모아진다. 좋은, 아늑한, 편한 형용의 지고의 물적 대상은 돈이다. 돈은 영육을 초월한 가치로 군림하고 대중은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한다. 기승전 재물은 철학과 문학과 역사를 간단히 제치고 앞서간다. 돈은 부끄럼과 치욕의 본질이 아닌데도 예전엔 돈과 사람을 도매금으로 치기도 했다. 요즘은 돈을 숭배하는 신도와 교주가 한데 엉켜 뒹군다. 생존 이후에 학도(學) 문(問)도 가능한 건 불변의 법칙. 그런데도 삶에 질문이 없다. 의혹은 기승전 돈이다. 그러니 답이 없을 수밖에. 인간이 다른 생명과 다른 점은 사유의 유무에 있다. 변화와 성장은 생명 가진 것들의 공통점이고. 변화와 성장에도 온도차가 있다. 어쩌다 어른이 되는 건 생각 없이 나이테를 불린 나무와 같다. 그러나 나무는 바람의 결과 햇볕의 기울기, 물기의 완만과 가파름을 가늠해 자신과 자식을 퍼뜨리고 키운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시련은 얼마인가. 태풍과 곤충은 시시때때로 갖은 얼굴로 다가온다. 한 그루의 성목(成木)은 사람의 일생과 같다. 어둠을 벗긴 사람의 아침과 황혼이다.

안말 외딴집에 외등이 점등된다. 백열전구의 노란 불빛이 따스하다. 아까부터 한 시간째 연기를 살핀다. 살핀다고 하지만 실은 시간 죽이며 마을의 동정에 무연히 눈길 보낼 뿐. 마을 사람들은 모아논 농사 폐기물을 태우는 덴 도가 텄다. 이곳 말로 처댄다고 하는데 오밤중이나 신새벽 흰 서리에 발자국 찍고 나와서 태워 없앤다. 바람의 장난이 없다면 산으로 옮겨 붙을 걱정 없다는 심산이다. 한 해 농사지으며 작물에 퍼진 병과 해충은 놔두면 이듬해 재발한다. 병반이든 알, 번데기든 병해충도 월동하면 기지개를 켠다. 불은 모든 걸 사멸한다. 재는 질량을 비우고 바람에 섞여 바람이 된다. 그래서 산불이 무섭다. 산을 깎은 인간의 저지레를 되갚는 꼴이다. 강은 물길을 파헤친 인간에 저항하며 녹색의 피울음을 연신 토한다.

회갈색의 옅은 공기가 진한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전조등을 켠다. 과수원의 덜 딴 사과가 빨간 불을 달아놓은 것 같다. 탈탈탈 무 배추 가득 실은 경운기가 달린다. 뒤에 탄 부인은 어깨를 움츠린다. 남편의 등에 어둠이 앉아 함께 달린다.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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