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by 소인


직장인

해가 바뀐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제보다 조금 깊어진 주름, 늘어난 흰머리. 여전히 일상은 삶의 고통으로 남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멈출 줄을 모른다. 내가 사는 의미를 캐내느라 번민하는 사람의 하루 편할 날이 없다. 휴식은 일의 연장이고 휴가 또한 유예된 노동 속의 토막잠이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잠들 때가 되어 누웠다. 현실과 잠 사이의 가수면 상태에서 막 잠 쪽으로 옮겨가는 참인데 밖에서 소리가 났다. 개가 어둠을 딛는 소린지 길고양이가 대문 앞에 놓아둔 사료 그릇을 당기는 소린지 명확하진 않지만 잠 쪽으로 건너가는 내 의식을 잡아끌었다. 잠이 물 끼얹은 듯 달아났다. 다시 잠을 청할수록 의식은 또렷이 살아났다.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일어나 다른 일을 하기에도 깊고 추운 겨울밤이었다. 실은 무얼 한다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내게 의미란 가치를 뜻했는데 요즘에 와서 가치를 따진다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새해 첫날 어둠을 더듬어 산으로 바다로 나가 일출을 살핀다. 소망을 빌고 일상의 안녕을 기원한다. 가족의 행복으로부터 지구에 이르기까지 빌 수 있는 희망은 죄다 꿈꾼다. 인간은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존재다. 그러나 꿈의 실현 다음에 찌꺼기처럼 앙금으로 갈앉은 감정의 공허는 어떻게 처리할 건가. 꿈은 이데올로기의 습성을 닮아 시효가 다하면 진화하거나 사멸한다. 더 높은 차원의 꿈이거나 사상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 나는 나를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사랑은 이쯤에서 멈춘다. 나르시시즘은 분열을 의미한다.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을 밖으로 걸쳐놓는다.

노인

무력감 무기력 자존감의 상실로 인한 관계의 실종. 모든 상황은 노인에게 근원적 고독을 부추긴다. 나이 들수록 안 아픈 데가 없다. 행복택시를 타고 읍내 병원에 가면 노인들만 득시글하다. 곁에 앉으면 쿰쿰한 냄새가 난다. 맡지 못할 뿐 내 몸에서도 날 거다. 추운 집에서 목욕한 지가 언제던가. 의사와 간단한 문답이 끝나고 한 보따리 약을 받아온다. 끼니때마다 밥보다 약에 배부르다.

연탄 갈고 들어와 꾀죄죄한 이불속에 파고들어가 잠을 잤다. 날이 새도 움직이기조차 싫다. 식은 밥 군내 나는 반찬,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정체가 불분명한 냄비 속의 멀건 액체. 놀거리 없고 얘깃거리 없으니 이웃도 찾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영화 화투짝처럼 들추는 것도 물렸다. 실은 비풍초 똥 삼팔의 영화일 뿐 일생이 지지리 가난에 뜯긴 삶이다. 엄동에 들앉아 지내도 달력 넘어가고 지겨운 나이 차곡차곡 쌓인다. 오래전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한데 일주일 아니 그저께 뭐하고 보냈는지 누구와 무슨 얘길 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한밤중에 깨면 여기가 무덤 속인지 이불 속인지 헷갈린다. 내가 살아 있기나 한 건지. 어쩌면 죽어 장사 치르고 소식 없던 자식 소식 듣고 찾아와 성가시단 표정으로 초상 치고 돌아갔나. 어둠 속에서 얼굴 꼬집는다. 아프다. 아직 무덤은 아니다. 체념도 아닌 채 도로 잠든다.

후배

명문대 나온 후배는 탄탄한 직장을 나오면서 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격증 공부하며 더 이상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버렸다. 잘 나가던 때의 착각을 버리고 나도 남과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큰 걸 이룬다는 기대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한계를 깨달으며 사는 게 삶의 보람이다.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바람이다. 어쩌면 설계만 하다 끝날지 모르지만 귀농의 꿈을 품고 사는 일상이 즐겁다. 한때 친했던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거나 소식 끊어져도 그 사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굳이 소외와 고독감을 부추겨 자존감을 낮출 필요는 없단 생각이다. 우아한 것들의 냄새나는 속살에 언제까지 코를 박을 순 없는 노릇이다.

다니던 경비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보했다. 동료들과 법조문을 찾아가며 부당한 회사의 처사에 저항했다. 빈속에 소주 마시며 보람도 느꼈다. 퇴직금 정산을 바로잡고 실업급여를 타게 되었다. 고독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가 나서 쓸모없다고 느낀 자신과의 끈을 놓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를 따습게 데우는 게 급하다.

나라

늙은 개는 이유를 모른다. 처음엔 느끼한 감자탕 국물과 뼈다귀 사흘 연해 마시고 씹은 탓인 것 같았다. 게다가 주인은 닭국물까지 만들어 코앞에 바치니 기름진 음식에 소화불량인 줄 알았다. 뒷다리 힘 떨어진지는 오래인데 앞다리 근력 예전만 같잖다. 사료는 입맛 없어 끊으니 온몸의 기력이란 기력은 가을날 기러기 따라 강남 간 느낌이다. 기어 나와 잔디밭에 철퍼덕 엎드려 종일 볕 쬐는 게 일인데 엊저녁부터 일어서질 못하는 거다. 안아다 집에 들이니 거친 숨 몰아쉬다 잠들었다.

작년 여름 자궁 출혈로 죽다 살아났다. 난생처음 가본 동물병원에서 피검사 초음파도 받고 열흘 치 약 지어먹었더니 돈값하느라 그런진 몰라도 기적처럼 살아났다. 이번 파수는 나이 치레인가. 개 나이 열일곱이면 천수를 누린 셈이다. 사람이나 기르던 짐승이나 함께 살던 추억은 어느 편이나 새겨진다. 떠나는 건 피할 수 없는 이치지만 이별이 막상 현실이 되면 상실의 슬픔은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이다. 찬바람 뚫고 자전거 타고 돌아와 늙은 개 안아다 마당에 내놓는다. 거듬거듬 힘 모아 간식에 입 댄다. 말랑하게 만들어 파는 간식은 입맛에 당기는 모양. 다행이다. 기력 다해도 섭생의 의지 놓지 않으면 생은 끝난 게 아니다.

이별

섬에 사는 네 딸들은 육지로 가려고 선착장에 나갔다. 찬바람과 사나운 파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나갈 수만 있다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쪽 섬의 배가 떠도 육지 쪽에서 배를 댈 수 없다고 했다. 거친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며 날뛰는 통에 접안이 불가능하니 배를 타선 안 된다는 전갈이었다. 딸들은 너울대는 바다를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세 번이나 선착장에 나갔다가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점점 자매들을 조였고 파도는 쉴 줄을 몰랐다. 이별을 위해서 촌각을 다투다니 살다 보면 속절없이 맞닥뜨리는 경우도 있다. 속일 수 없는 운명. 드러나는 삶의 적나라한 실체. 네 번째로 바다에 나가서야 배를 탈 수 있었고 육지에서 기다리던 아버지 친구는 어린 자매들을 뱃머리서 안아다 차에 태우고 서울로 내달렸다. 버스전용차선으로 허위허위 달려간 병원에서 자매들은 젊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임종을 지켰다. 마흔둘의 걱실하고 자상했던 아버지는 희미한 웃음 지으며 먼길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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