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단상
어둔 마당에 나가니 골짜기에서 부우 부우 부엉이 소리다. 텃새인데 꼭 이맘때 운다. 봄밤에는 소쩍새 찾아와 늦은 봄까지 소쩍소쩍 목구멍에 피 맺히도록 운다. 충청도에서 혼새라고 부르는 호랑지빠귀도 새벽 푸르스름한 여명 깨우며 휘익 휘익 휘파람 소리를 낸다. 이름 탓일까. 혼새의 소리는 죽은 자를 부르는 소리 같다.
가래골이 생기고 살다 간 이들의 혼백이 무덤에서 걸어 나와 어둔 새벽 공기를 휘젓는 것 같아 무섬증이 인다. 그러나 혼백의 조상조차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왕국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변방으로 쫓겨난 신라의 후손들이 지붕을 얹고 샘을 파고 살았던 시대부터 중앙에서 밀려난 사대부가 세거 하며 마을을 이룬 것일 게다. 그들의 한숨과 뜨거운 입김이 스치는 바람결에 묻었으려니 나 또한 바람결이거나 흙의 먼지가 되어 떠다닐 날 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낮에 산길에 가면 쒕쒕! 산꿩 운다. 산기슭 마른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도 난다. 귀중중한 비닐처럼 날던 까마귀 떼 슬슬 물러나고 해오라기 백로 어깨 뽕 넣고 외다리로 선 채 물속 노려본다. 마른풀 사이 초록 불처럼 점점이 풀 싹 일어난다. 밭터서리에는 땅바닥 내려다보며 냉이 캐는 여자들 흔하게 만난다. 봄은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숲에서도 원추리 싹처럼 푸른 생명을 밀고 돋운다.
뼘뙈기 우리 집 마당에도 꽃다지 두툼한 입술 파랗게 돋는다. 사방에 봄 기척 소란스럽다. 경칩 다가오는 농촌에는 논밭으로 거름 내는 트랙터 경운기 땀 빼고 한길마다 흘려놓은 두엄 널브러졌다. 개천에는 물오리가 명량 앞바다 충무공 판옥선처럼 부쩍 늘었고 낚싯대 든 훌치기 꾼 물가 오르내리며 음험한 시선으로 물 바닥 살핀다. 똥내 나는 물에서 낚은 고기 가져다 끓여 먹는지 궁금하다.
봄은 슬슬 공습의 기미를 감질나게 보이다 어느 날 일제히 산과 들을 점령한다. 쑥보다 기세 등등한 애기똥풀 꽃이 천지 빛깔로 피어나면 골짜기 어딜 가도 꽃대궐이다. 봄의 공습에 사람도 짐승도 속수무책이다. 골골이 방사하는 리비도의 에너지 차고 넘친다. 이때쯤 군둥내 나는 신김치 물리고 새뜻한 풋것이 입맛 당기는 무렵이다. 들판 가운데 차 세우고 도시락 펴면 알에서 깬 날벌레, 벌통에서 나온 꿀벌, 소똥에서 탈출한 파리서껀 붕붕댄다. 데워진 공기 타고 풍기는 돼지똥 냄새로 벌써부터 창문 꽁꽁 싸매고 다닌다.
일평생 훍더버기로 살아와 징그럽고 물리고 질릴 만도 한데 농부는 모종판 고이 날라 평미레로 쌀 됫박 밀듯 상토 담아 살뜰히 키운 고추 모종 꽂는다. 양쪽으로 벌어진 떡잎 뜨악한 표정이더니 이내 정신 수습하고 곧추선다. 될 성 부른 떡잎이 걱실하게 크는 법. 매만지는 손길에 애정이 듬뿍 실렸다. 푸진 봄볕이 하우스 구석구석 쏟아진다.
유록 안골 자두농장에 겨우내 꼼짝 않던 두봉 씨가 나타났다. 파독 광부로 먼 나라 독일의 땅속에서 석탄 캐서 살림 밑천 모았단다. 시내 사는 충선 씨는 고향 마을에 논 서너 마지기와 자두나무 육십여 그루를 팔 년째 키운다. 추희(秋姬) 품종은 구월에 딴다. 맛 좋고 저장성 길어 인기 품종이지만 최근 귀농인의 공략 대상이 되면서 시세가 떨어졌다. 갈수록 근력 예전만 못하다는 충선 씨 살구나무 종아리에 퇴비 넣는다. 골짜기 개울도 땅 풀려 지금거리던 숲의 물기 모아 졸졸대며 흐른다. 느물한 밀뱀의 몸뚱이 같은 다래덩굴에 초록 새순 초록 불 피운다. 봄 아래 더러운 것, 부지런한 것, 구태의연한 꿈이 펼쳐진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르면 먼지 속 봄이란 놈 부옇게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