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45)
능포항은 차로 오 분 거리다.
수영장 다녀와서 운동으로 피로한 몸을 주무르다 점심 먹고 가는 곳이다. 처음엔 조각 공원과 벚꽃 길 산책로를 자주 갔는데 요즘은 능포(菱浦)항에 간다. 수영장 가기 전에 들르기도 하고 오후에 가는 적도 있으니 하루에 두 번 능포 바다를 보는 셈이다. 버스 종점을 지나면 왼쪽에 빨간 등대가 오른쪽에 하얀 등대가 마주 보고 섰고 가운데가 배가 드나드는 물길이 부산 방향으로 났다. 만곡진 항구 주변은 데크를 깔아 공원으로 꾸몄다.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에는 낚시꾼이 아침부터 캐스팅에 열심이다. 주차장엔 캠핑카가 서너 대 보인다. 산으로 바다로 전국을 누비는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하긴 남들 눈에 놀러 다닌다고 다 여유로운 건 아니겠다. 더러는 평범한 일상에 밀려나 동가식서가숙 하는 유랑하는 낙 있어야 지리멸렬한 삶에 생기가 돌 거다. 한 남자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서 미역을 줍는다. 그의 팔목에 치렁한 미역 줄기가 걸려 있다. 테트라포드에서 청어를 낚는다. 동해안 청어에 비하면 새끼 크기의 청어가 짠물을 털고 나온다. 방파제엔 이른 아침 생선 맛보러 나온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았다. 능포항에 사는 고양이들은 낚시꾼이 던져주는 선심에 이골이 났다. 사람이 다가가도 꿈쩍 안 한다. 느물스러운 관록이 얼굴에 새겨졌다. 어떤 녀석은 물 빠진 갯바위를 뒤져 게를 잡기도 한다. 낚시 데크 아래서 본 치즈 냥이는 갯바위 사냥꾼이다. 은밀한 탐식을 즐기는 녀석은 쳐다보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얼른 피해 주는 게 상책이다.
데크 아래는 미역 밭이다. 물 맑은 날 미끈한 줄기를 하느작대며 춤추는 미역의 군무를 보는 것도 장관이다. 방파제 안쪽의 수변 데크 주변에는 종패를 뿌려 일반인이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 햇볕 투명한 날 여섯 명의 해녀가 제주와 다른 숨비 소리를 뱉으며 물질하는 것을 보았다. 긴 오리발을 하늘로 팔락이며 물속에 곤두박질친 뒤 시간을 쟀더니 삼사 십 초 동안 물 바닥을 뒤지다 올라왔다. 그녀들은 외항에서 내항으로 옮겨 가며 자맥질을 했다. 겨울 어느 날 남자가 방파제의 테트라포드 위를 위태롭게 걸어 다니며 홍합을 따는 것을 보았다. 아내인 듯한 여자가 방파제 난간에 미역을 줄줄이 널어 넣고 남자를 보고 있었다. 커다란 아이스박스에는 이미 반 넘게 홍합이 들어 있었는데 남자는 하염없이 홍합을 땄다. 이웃과 나눌 생각인지 그들의 채집은 그치지 않았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여자는 물 위에 치렁하게 떠 있는 해초가 전부 톳이라고 알려준다. 겨울이면 내륙의 마트에서 톳을 사다 먹었다. 파르스름하게 설데친 된장 톳 무침을 좋아하는데 톳밥을 해먹기도 했다.
갯바위 낚시터 부근 바다는 민간인 출입 금지다. 함부로 수경을 쓰고 들어갔다간 어촌계에 걸려 낭패 보기 십상이다. 레저 문화가 일반화되어 무분별한 관광객의 해루질은 어민의 수입과 바다 생태계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도시 생활에 지친 관광객은 최적화된 장비로 바다를 뒤져 갯것을 잡는 일에 재미를 붙이지만 누구는 폐허로 변한 바다에서 한숨밖에 건질 게 없다. 여기 관광객은 바위틈에서 고동을 줍는 게 고작이다.
아, 여긴 갈매기 외에도 섬의 골목 하늘을 점령한 까마귀가 날아와 방파제를 엿살핀다. 하늘길에서 접촉사고 나지 않는다면 새들은 영토를 두고 다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바다오리 한 쌍이 데크 주변에서 번갈아 자맥질을 한다. 종달새 닮은 작은 새 두 마리가 쫑쫑 날며 방파제 석축 사이를 뒤진다. 청동빛 외투를 걸친 검은 새를 좋아한다. 깍깍 떼로 몰려다니며 방정맞은 까치보다 까마귀의 빛나는 눈과 검은 부리는 위엄을 뿜어내는 듯하다. 까마귀는 영리한 새다. 산판에서 일할 때 배낭을 뒤져 빵을 훔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까치를 길조, 까마귀를 흉조라 하지만 일본에선 반대다. 불길한 조짐을 알려 몸가짐을 삼가란 경계의 지표인 새는 에드가 알란 포우의 검은 고양이처럼 존재에 내재된 불안과 공포를 꾸미지 않고 드러낸다.
낚시 데크에서 양지암 등댓길 입구에는 동네 장년들의 사랑방이 있다. 패널로 비를 가린 오두막에 커피 자판기가 있다. 안주거리를 놓고 술 마시며 오가는 사람을 살핀다. 현업에서 떠난 장년들의 낙이다. 이곳엔 나이 든 사람도 조선소 근무복을 걸치고 다닌다. 고기떼가 몰리는 시간엔 던지자마자 문다. 학꽁치, 청어를 수북하게 잡은 낚시꾼이 자랑스레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여준다. 옆에서는 작은 도마 위에 청어를 올려놓고 연신 배를 갈라 물통에 던진다. 동해 청어보다 크기는 작아도 횟감으론 그만이겠다. 술 생각이 났으나 술 마신 지 한 달이 돼간다. 주민들은 대화를 주고받는 데 거리낌이 없다. 관광객은 바다를 건성으로 훑듯 지나친다. 나도 너도 우리는 모두 지구 행성의 이방인이다.
빨간 등대 앞에 수변 공원이 있다.
송이째 달고 있는 먼나무 빨간 열매가 해를 받아 반짝인다. 생울타리로 심은 홍가시나무 새순이 빨갛게 달아오른 새색시 볼 같다. 안쪽 화단에는 키 낮은 돈나무가 무성하다. 이곳 바닷가 숲은 삼나무와 해송 일색인데 사이사이 돈나무와 후박나무가 자생한다. 섬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면 초록이 무성한 게 여름으로 착각하고 남겠다. 후박나무 가로수가 기온이 오른 날 그늘을 만들어주니 마치 한여름 풍경이다. 팔손이나무는 산자락이나 공터 어디를 가리지 않고 흔하다. 문화원 뒤란에서 팔손이나무와 비자나무를 보았다. 남도의 상록 활엽수는 겨울을 제외하고 연중 자라니 대만에서 본 반얀나무처럼 왕성한 생육은 아니어도 사철 푸르러 눈의 피로가 풀린다.
돌아가는 길에 조각 공원으로 올라갔다. 공원 입구에서 장승포 방향으로 가는 길에 벚꽃길이 있다. 오래전 버스회사 회장이 심었다는 표지석을 본 적이 있는데 벚나무는 고목으로 자라 우람한 팔뚝을 좌우로 벌리고 해풍을 맞고 있다. 길가 양지에는 노란 수선화가 꽃을 피웠다. 삼 월중순이 넘어가자 내륙에서는 한참 멀었을 조팝나무 꽃이 하얀 꽃을 수북하게 달았고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섬 벚꽃의 절정은 사월 초순이라는데 꽃망울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백꽃과 벚꽃의 어울림이라니 나로선 처음 만나는 광경에 꽃의 만개가 기대된다. 꽃이 활짝 피었다는 중국어 단어는 셩카이(盛开)라고 한다. 꽃의 전성기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피기 전의 꽃망울, 활짝 핀 모습도 좋지만 공허한 희망과 헛된 기대보다는 벌과 나비, 새에게 꿀을 빨리고 꽃가루를 묻혀주고 시절을 다한 꽃의 주검이 더 위대해 보인다. 거룩한 죽음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인간은 진실을 찾지만 생태는 부러 꾸미지 않아도 스스로 그러하다. 따스하거나 차갑지 않은 천지 불인(天地不仁)이 자연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연의 숨통을 조이고 발목마저 잘라놓았다. 자연을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인식은 자연과 문명의 공멸을 앞당기기 시작했다. 꽃을 보며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식물이 살면 그와 더불어 공생하는 것들의 목숨도 오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