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44)


난생처음 그림 교실에 나갔다.

섬의 문화원에서 하는 교양 강좌의 하나다. 과목은 서예, 댄스, 서양화 등 기능 위주인데 서양화 반에서 수채화 기초를 배우기로 했다. 강원도에서 중국어 초급반을 다닌 적이 있다. 중국어에 재미를 붙여 열중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외워버린 문장 몇 개를 제외하고 모두 잊어버렸지만 일어를 포함해 한자 문화권의 언어와 글자를 아는 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때 이후 뭘 배우러 다닌다는 건 처음이다. 미술 강좌는 코로나로 삼월 중순이 되어 개강했다. 7월까지 일 학기이니 오 개월 가까이 수채화를 배우는 코스다. 이학기를 마치고 연말에는 회원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한다고 하는데 이학기 참여는 불투명하다.


첫날 비닐 백에 스케치북 물통 팔레트와 붓을 넣어 갔다. 작년에 쫑파티를 하고 청소하지 않아 이층 화실은 지우개 가루와 먼지가 푹푹 쌓였다. 회원들이 빗자루를 잡고 청소를 시작하자 나도 멀뚱히 보고 있을 수 없어 거들었다. 대걸레를 빨아 바닥도 문댔다. 작년 회원이 십여 명이고 신입회원은 다섯이었다. 회원들은 작년에 그리다 만 그림을 손질했고 신입회원은 4B 연필 쥐는 법부터 해서 사절 스케치북에 선긋기 연습을 했다. 수평 수직 사선으로 선을 긋고 구형에 명암을 주며 그러데이션 연습을 했다. 미술 교사 출신인 육십 초반의 선생은 돌아가며 그림 코치를 해주었다. 선생이 내 비닐 백을 들여다보더니 스케치북을 꺼내 본다. 2013년 겨울에 그린 황태 덕장 그림이 나왔다. 회원들이 몰려들어 그림을 보며 탄성을 낸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쩌랴 난 수채화를 배우러 왔으니 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기초부터 익혀야 한다.


가르쳐준 대로 선을 그었다. 선생이 회원에게 미술 지도를 할 때마다 가서 귀담아듣는 것도 수업에 도움이 된다. 짧은 기간에 이모저모 레슨을 많이 들어야 실력도 쌓일 것 같다. 회원들의 작품은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 그림으로 풍경과 꽃 그림이었는데, 다양한 소재를 다루어서 보고 배우는 데도 좋았다. 다른 곳에서 배우다 문화원으로 온 회원도 있었다. 선생의 지도 솜씨 소문을 듣고 나왔다고 했다. 정성을 다해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자신의 능력을 타인에게 옮기는 행위와 전수받는 자세는 스승과 벗의 마음이라야 서로의 교감이 우러나온다고 생각한다. 좋은 관계의 만남이 기대된다.


열 시에 시작한 수업이 금세 두 시간이 지났다. 첫날은 남자 회원이 청해 선생과 셋이 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농담을 좋아하는 남자였는데 부산에 집이 있고 섬에 살고 싶어 작년에 왔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수영장이 있는 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가 있다며 보러 간다며 헤어졌다. 나는 임시 주차장으로 쓰는 모텔에 가서 차를 빼 수영장으로 갔다.

미술 수업이 있는 화, 금요일은 오후 수영이다. 오늘로 세 번째 수업인데 두 번, 세 번은 수업 끝나고 남아서 그림을 더 그리는 회원들과 김밥을 사다 점심을 때웠다. 맨날 김밥 두 줄 값만 주고 김밥을 기다리기가 미안했다. 회원들은 서로에게 상냥했고 관심을 보였다. 그림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모여 그런 것 같다.


회화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그린다는 건 흥분할 만큼 가슴 뛰는 일이다. 저마다 관심과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라 그림에 대한 열정과 색채감이 탁월하다. 살아오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리고 싶다는 열정이 앞섰을 뿐, 그림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다. 멋진 그림보다는 시대와 현실 인식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굴뚝같다. 사진 이미지에 대한 유한성과 내포된 기만을 뛰어넘는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하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나의 표현으로 옮겨내고 싶다. 나이브하게 이쁜 꽃과 수려한 풍경의 몰입보다 더러운 것, 추한 현실을 회화로 드러내고 싶다. 파스텔톤의 몽환적 색채보다 거친 먹의 질감을 좋아한다.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심연, 칠흑 같은 무명(無明)의 세계 말이다. 늦게 시작한 수영과 그림, 죽기까지 손에서 놓지 않을 책과 더불어 말년의 도락이 이 정도라면 빈한한 필부의 일상으론 돌 올(突兀) 하지 않은가.


교실은 열다섯 평 정도로 넓은 편은 아니지만 냉난방기와 정수기, 커피 물 끓이는 포트가 있다.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기존 회원의 자리가 있고 가운데 기다란 책상에는 좌우로 신입회원의 자리다. 이젤에 화판을 받치고 그림을 그린다. 슥슥 싹싹 하얀 도화지 위를 오가는 연필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휘휘 물통에 붓을 휘젓는 소리가 개울물 소리처럼 부드럽고 청명하다.


두 시에 시작하는 수영장에 갔다.

섬에는 매일 이천 명 가까운 확진자가 나온다. 수영장 이용객도 좀체 늘지 않는다. 넓은 수영장에 대여섯 명의 사람이 퐁당퐁당 물을 차며 레인을 오간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풀로 내려간다. 오리발 레인 앞에서 준비 운동을 한 후 물에 뛰어내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맨발로 25미터 레인을 왕복한 후 킥판을 잡고 발차기하며 레인을 네 번 오간다. 다음엔 풀 브이를 사타구니에 끼고 손동작을 가늠하며 레인을 탄다. 이후 숏핀을 신고 자유형으로 레인을 왕복하는데 요즘은 한 번에 열 바퀴, 500m를 돈다. 시간으론 십 분 남짓 걸린다. 숨 가빠도 호흡이 조절되니 페이스를 늦추진 않는데 일 키로 수영을 슬슬 머리에 두고 있다. 아무래도 옆 레인에 아는 이가 있으면 힘도 날 텐데 오후 수영에는 아는 얼굴이 별로 없다. 섬에 내려와서 주로 오전 수영을 했기 때문이다.


B군에서 어설픈 영법으로 오십 미터만 가도 숨이 찼는데 비록 핀 수영이지만 오백 미터라니 장족의 발전이다.

글라이딩, 스트롴, 발차기, 롤링, 팔꺾기 동작을 염두에 두고 헤엄치는데 한쪽을 신경 쓰면 다른 쪽을 놓치기 일쑤다. 어쨌든 자세가 이쁜 수영이 균형 잡힌 영법이다. 옆 레인에는 젊은 남자가 벌어진 어깨로 천천히 일 키로 수영을 한다. 그는 틈틈이 접영을 하는데 난 왼 어깨 수술로 접영은 접어야 할 듯싶다. 배영, 평영을 가끔 하지만 당분간 자유형 동작에 집중할 생각이다. 쉬지 않고 이십 분, 사십 분 수영이 목표다. 바다에 나가면 롱핀을 신는 데다 짠물이라 부력이 좋아 훨씬 수월할 것 같다. 수온과 파도가 변수인데 트라이애슬론 수영 슈트는 가격이 엄청 비싸 사는 건 미루었다. 롱핀과 부이(buoy)를 장만하고 슈트는 여름용으로 하기로 한다.


여름이 가까우면 구조라 해수욕장 해변에서 바로 앞에 떠 있는 무인도까지 오가는 게 당장의 목표다. 직선거리 오백 미터이니 어려운 목표는 아니다. 가깝고 바다가 잔잔해 단골 오픈 워터(open water) 장소로 정했다. 모래사장과 무인도의 솔숲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섬에서 삼 개월째. 슬슬 섬의 속살이 손에 만져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나 신기한 물상이 아니다. 진부한 세속의 일상이지만 그러기에 살아내야 할 서늘하도록 소중한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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