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by 소인

단상


는 그쳤는데 하늘은 좀처럼 열 기미가 없다.

산책 나온 사람들은 꽁꽁 싸매고 걷는다. 바람은 불고 이빨을 드러낸 바다는 육지를 물어뜯을 기세로 줄기차게 달려들지만 땅에 닿자마자 부서진다. 의지는 하늘에 닿을 듯해도 현실은 단단한 절망이다. 선거가 끝난 지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끝난 것 같다. 축배를 든 무리는 자리를 나눠 먹기 위해 공약 따윈 잊을 거다. 투표한 사람들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바뀌지 않는 세상은 마찬가지란 걸 알고도 투표에 열광한다.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사는 건 태어나지 말았다면과 닮았다. 존재는 고통이 본질이다. 덜 더러운 쪽이 그래도 낫게 보이는 건 아주 더러운 꼴은 절망의 틈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백꽃이 뒹구는 자리에 수선화가 피었다. 조화 같은 꽃이 바람에 떤다. 남자는 개 줄을 잡고 여자는 개가 눈 똥을 담고 있다. 개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다. 조각 공원 입구부터 벚꽃길까지 차로 갔다가 되왔다. 조각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좀 잤다. 잠에서 깨어 여기가 어딘지 수초 동안 헤맸다. 맨날 노는 놈이 늘 피로하다.


수영하고 그림 교실 가는 날은 갑절로 피곤하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 책을 읽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책을 읽지 않으니 마음이 외려 편안하다. 편협한 사유에 휩싸일 것도 없다. 수영장에 다녀오면 그날의 동작을 복기한다. 유튜브를 보고 잘못된 동작을 고치며 머릿속으로 헤엄친다. 침대에 엎드린 채 허우적댄다. 사랑을 하면 잡은 연인의 손끝에 오만가지 감각이 서린다. 복잡한 그물로 짜인 사랑의 감정은 비누 거품 같기도 하고 영원히 빛날 것 같은 밤하늘의 별자리 같지만 시간은 영원을 찰나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기 일쑤다. 수영은 팔다리를 움직일 때 다른 신체의 감각, 머리와 가슴, 배 엉덩이 허벅지까지 동시에 일체를 이루며 움직여야 수영이라는 행위가 가능하다. 완벽에 가까운 수영을 하려면 수만 번의 동작을 되풀이해도 될까 말 까다. 자신이 쓴 글은 독자가 보고 판단하지만 헤엄치는 자신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지인(독자)이나 강사가 지적해야 고칠 수 있다.

집에서는 그림 교실에서 회원이 한 채색 연습을 따라 하거나 연필 선 긋기 연습을 한다. 생각나면 부리나케 붓을 들어 간단한 정물을 그리고 쳐다보며 부족한 점, 잘못된 곳을 찾아 머리에 담는다. 스케치부터 붓 터치와 채색까지 급한 성격이 드러난다. 사진처럼 그리면 사진을 찍지 그릴 것 없다. 극사실화를 그리지 못하지만 그런 작품을 보면 섬뜩하다. 그림은 그림다워야 하는데 사진은 한 번에 모든 걸 보여주는 것 같아도 박제된 관념 같다. 그림은 손이 가는 터치에 작가의 호흡이 따라간다. 그림을 보면 작가의 성격이 보인다. 작품의 해석은 보는 사람 마음이지만 대체로 그림에 주제가 나타난다. 우리는 학교 교육과 일상의 습속에서 정형화된 개념에 익숙해져 시나 그림의 해석에 인색하다. 사유의 깊이와 폭을 접고 빠른 판단과 결론으로 주제를 결정한다. 회원들의 그림은 풍경과 꽃 그림 일색이다. 하긴 보이는 게 풍경이고 나무이니 그럴만하다. 소재는 달라도 주제는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있으리라. 표현하고 싶은 건 작자의 가치관이다. 그의 사유에 벗어난 주제는 다루지 않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이쁜 그림' '좋은 글'이란 보는(읽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 그림과 글이라면 우리는 이쁜 것과 좋은 것의 홍수에 산다.


게르니카와 한국 전쟁을 그린 피카소 같은 대가의 작품을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박불똥, 홍성담 제주 4•3 사건을 그린 강요배 화가를 생각한다. 반생명의 절망적 사건을 그리고 고발했다. 시대의 몰인식과 몰가치를 고발한 화가는 드물다. 글과 그림에서 음악에서 시대성을 읽는다는 건 인간은 현실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란 의미에서다. 이중섭이 제주도에 피난 가서 그린 게와 아이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성 회복을 절규한다. 잃어버린 안빈낙도에 대한 희구를 그림에 담았다. 조선 숙종 때의 화가 최북(崔北)의 「풍설야 귀도(風雪夜歸圖)」를 좋아한다. 그림을 강요한 귀인에 대항해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한 기인인 그의 그림 「풍설야 귀도」는 볼수록 화가의 처지와 나의 심경을 닮았다. 눈보라 치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이와 동자의 앞에 다리가 있고 오두막이 보인다. 쓸쓸한 외출 뒤 지친 걸음을 딛는 두 사람의 미래는 눈보라와 다를 게 없다.


내가 아는 젊은 작가는 고양이 그림을 즐겨 그린다. 고양이의 은둔과 공간성은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담기도 한다. 다른 화가는 우울한 여성의 초상을 즐겨 그렸다. 한 번은 지역 문예지에 그의 그림을 표지로 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차별과 배제, 소외와 비가시적 존재인 여성성을 드러낸 게 불편하다는 것이었고, 문학 동인지의 표지는 꽃 피는 봄날 같은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는 도식에 굳어진 거였다. 불편함, 나쁜 것, 불쾌한 것은 멀리하고 모두 함께 좋은 것으로의 전진이 시대의 발전과 삶의 향유에 어울리는 명제라고 생각하니 빚어진 현상이다. 그래서 불편한 그림은 팔리지 않는다.



재일 작가 서경식은 「고뇌의 원근법」에서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라고 말한다.


동안 뜸한 시인에게 뒹구는 동백꽃을 찍어 보냈다.

집에 돌아와 낡은 실내화를 벗어놓고 그리는데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제가 죽었다고 했다. 가슴이 서늘해졌으나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시인은 이제 자기가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말자고 했다. 정말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면 바람이나 쐬러 내려오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영영 마지막인 것 같은 느낌이 목젖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만나고 헤어져야 삶의 끝을 보게 될까. 통화하면서 붓으로 남아시아산 마로 짠 실내화 바닥을 찍었다. 해진 실내화 바닥이 너덜한 내 모습 같다. 다행인 건 수영과 그림에 몰입하는 현재다. 물의 저항을 계속하는 것과 하얀 여백에 얼마나 물감을 찍어낼지는 알 수 없다. 홀로 밥 끓이며 독한 존재의 사슬을 부감(俯瞰)하는 것,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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