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43)


는 영법을 유튜브로 배웠다.

수영장에 나가기 시작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강습은 중단되었고, 불안한 시선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풀에서 목을 내밀고 수영하고 있었다. 수영 아니면 할 게 없는 사람들인지 몰라도 용감하게 물살을 헤치며 레인 벽을 터치하고 돌아서 물속으로 처박혔다.

코로나는 끝물에 들어섰는지 확진자 수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면서 사망률은 낮았다.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를 독감 정도로 여기지만 연일 발표되는 확진자 수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노약자는 여전히 불길한 하루를 보낸다.

수영장에서 돌아와 접이 침대를 세우고 청소했다.


섬의 원룸에는 다리가 긴 거미가 주인처럼 상주하고 있었다. '롱다리 거미'는 욕실, 싱크대 구석 옷장 틈 등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다. 처음엔 잡지 않고 외출 전 살충제를 뿌리고 나갔다. 돌아와 롱다리 거미의 사체를 치우는 게 전부였는데 요즘은 보자마자 화장지로 집어 쓰레기 봉지에 던진다. 던지기 전 죽을 만큼 살짝 누른다. 가는 다리는 몽창 부러졌을 거다. 롱다리 거미는 독을 뿜거나 병균을 옮기는 것 같진 않다. 외려 순한 성질인 것도 같다. 시골집에서는 거미가 하루살이나 날벌레를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거미줄을 발견해도 치우지 않는다. 비 온 날 이슬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거미줄을 보면 정교한 솜씨에 감탄하기도 한다. 가을날 빈 논에 나락을 묶어 거꾸로 세워놓은 농부의 솜씨를 보면 예술 작품을 떠올린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존을 위한 작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들이 감탄의 탄성을 올릴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게 많다. 고대 마야인이 쌓은 석축의 틈으로 A4 용지조차 들어가지 못한다. 거미는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직조한 거미줄을 엉성하게 짜거나 대충 만들지 않는다. 벌집은 어떤가. 벌들은 육각형의 정밀한 인큐베이터를 만들어 새끼를 키운다.


휴양림 관리인 할 때 숙소 처마의 벌집을 제거했다. 손님이 구조 요청을 하면 용감하게 사다리 타고 올라가 에프킬라를 뿌리고 장대에 기름 먹은 헝겊에 불을 붙여 벌집을 태웠다. 어른 벌은 달아나고 떨어진 벌집에서 하얀 애벌레가 꼬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밖에 나갔다 돌아온 벌은 집이 없어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맴돌았다. 그해에만 휴양림에서 집에서 벌에게 스무 방을 쏘였다.

베어링 공장 청소부 할 때 거미 제거작업을 수시로 했는데 처음엔 죽어도 하기 싫었다. 문 입구의 천정에 주로 사는 거미는 항상 불룩한 배를 하고 있었다. 빗자루에 장대를 달아 기다랗게 만들어 쓸듯이 거미줄을 걷으면 바닥에 떨어진 거미들은 똥줄 빠지게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걸 작업화로 밟아 죽이는데 발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가 났다. 동료가 하는 걸 따라 했는데 못할 짓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엔 예사로 하게 되었다. 거미는 빗자루 다가가는 낌새를 알고 잽싸게 내뺀다. 어서 멀리 달아나라 빌며 느릿느릿 빗자루를 휘둘렀다. 시골집 지붕 개량비를 모으고 석 달 열흘만에 공장 청소부일을 때려치웠다. 여름에 들어가 늦가을에 나왔는데 그동안 탄 얼굴은 새까만 숯덩이로 변했다.


인간은 대충 살기도 한다. 목표는 멀고 이루기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습속을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삶도 속을 들여다보면 썩어 문드러져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멀쩡한 정신이 외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눈 감고 입 닫고 마음마저 지퍼를 채우고 산다.

방 청소를 하면 산란했던 마음마저 정돈되는 기분이다. 자살하는 사람도 방 정리를 하고 이승에서의 흔적을 지우고 떠날까. 죽은 다음 이웃이나 유품 정리사가 들어와 본다면 부끄럽게 느껴져 말끔하게 뒷정리를 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마지막에 쓴 번개탄의 포장 비닐을 분리수거한 고인이 있다. 송파 세 모녀는 공과금을 담은 봉투와 이웃에게 미안하다는 메모를 남겼다. 마지막에도 인간은 예의를 잃지 않는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적 존재다. 더 사는 게 무의미하고 고통과 절망이 반복되는 앞날이 뻔한 절벽 앞에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이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호상이 아닌 고통 속에 죽은 망자를 위해서 남은 이들은 편히 쉬시란 말을 붙인다. 내세가 있건 없건 다음 생을 믿건 말건 그래야 남은 이들이 편하다. 종교로 결속된 사람들은 내세를 믿음으로 편하게 보내고 떠나지만 그도 없는 이들은 바람처럼 온 것처럼 바람처럼 떠난다.

역사에 치인 개인들은 모두 소리 소문 없이 떠났다. 식민지 시절 태어나 전쟁을 경험한 큰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랬다. '좋은 삶'을 오래 산다는 건 희망에 불과하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수명을 백 세까지 올려놓은 건 저주에 가깝다. 주변을 둘러보면 징후는 이미 질펀하게 널렸다. 백 세를 칭송하는 보험사만 신났다.


수영을 다녀오면 몸이 스펀지처럼 무겁다. 책을 펴고 한쪽을 넘기자마자 고개가 처박힌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문장을 더듬는다. 개미 같은 활자가 줄지어 눈 안으로 들어오다 증발하듯 사라진다. 얼굴은 베개와 붙어버린다. 안경을 벗어 머리맡에 던지고 부드럽게 몸을 밀착해 잠 속으로 떠난다. 영법이 몸과 맞아도 구십 분 수영은 고된 운동이다.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쑤신다.


오늘은 남자가 나뿐이었다.

아줌마 다섯과 함께 여섯 사람이 레인을 하나씩 차지하고 수영을 했다. 어제 오전은 미술 교실 개강으로 스케치북에 연필 선만 긋다 오후에 갔다. 오늘은 수영 고수 K도, 콧수염도 안 나왔다. 콧수염 기른 사내는 매일 나와 초보 레인에서 킥판을 잡고 허우적댔다. 강습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는 매일 나와 혼자서 열심히 물을 튀겼다. 올 적 갈 적 인사를 잘해 나도 보면 꼭 인사하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코로나 확진이 되었나. 확진자 수가 급증해 몸 사리기로 한 걸까. 날 풀리자 두꺼운 슈트 입고 바다 수영하러 갔나. 고수 K의 전번을 알지만 안부를 묻기엔 그리 터놓은 사이는 아니라 참았다. 아는 얼굴이 없으니 혼자 하는 수영이 맥 빠진다. 열 번 왕복을 일고여덟에서 그친다.

아, 속으로 이쁜이라 부르는 젊은 여자가 늦게 왔는데(그녀는 제 시간이다) 그때 나는 나갈 시간이 되어 나왔다. 킥판을 제자리에 두고 샤워실로 가다 가느다란 하얀 팔을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벽을 마주 보고 앉은 자세로 물에 몸을 담그고 미끄러지듯 턴 하는 동작은 물고기 같았다. 내가 맨 끝 6번 레인 물속에서 고개를 돌리면 2번 레인에서 물을 차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물안경 너머로 또렷하게 보이면 힘이 솟는다. 두 번 왕복할 걸 세 번 네 번 더한다.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힘을 주는 베풂은 가피(加被) 수준이다. 나의 그녀에 대한 시선에는 정념이 없다. 싱싱한 활어 같은 젊음이 부럽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방 청소를 하다 접이식 침대의 크기를 줄자로 재었다.

가로 세로 두께를 재서 차 뒷좌석에 앉아 실을 수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간신히 들어가겠는데 예행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택배로 부치거나 지붕에 올려 납작한 바로 묶으면 되지만 차에 넣는 게 제일 안전하다. 짐은 작은 차에 맞춤할 정도다. 더 늘어나는 건 최대한 자제했는데 살다 보니 프라이팬 화판 침대와 비데가 늘었다. 이제 와서 이삿짐을 염두에 두는 건 6개월 계약기간 때문이다. 여기서 하반기 일자리를 구해도 낮에 하는 미술 강습에 나갈 수 없고 수영은 퇴근 후에나 가능하다. 그럴 바엔 집에서 놀며 수영하는 게 낫다. 섬에서 육 개월 독거 생활했으면 할 만큼 한 거다. 섬 사람들은 겉보기에 내륙보다 트인 것 같다. 하지만 내면은 단순하지 않다. 바다를 끼고 살아서 그런 것 같다. 기후와 환경은 사람의 성정을 숲처럼 고요하고 깊게, 대양처럼 드넓고 포용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개인의 경험에서 습득한 세계관이 거지반이다. 다음엔 아주 정착할 요량으로 산촌의 빈집을 꼼꼼하게 물색할 작정이다. 멀리 뛰기 위해 일보 후퇴다. 스토브 난로에 장작을 땔 수 있는 오두막이면 좋겠다. 미술 강습이 7월까지니 한 달 더 머무를 수도 있겠다. 그때면 수영 거리도 1km로 늘어날까. 요새는 마음만 먹으면 오백 미터는 한 번에 간다. 물론 삶은 예측 불가능이고 변화는 짐승처럼 수시로 출몰한다. 글쓰기를 마치자 문앞에 툭 소리가 나고 문자가 떴다. 4절 200g 스케치북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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