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46)
화•금요일은 오전에 화실에 가고 오후엔 수영장에 간다.
열 시부터 두 시간 연필 데생 연습하고 도시락을 싸 온 회원들과 김밥을 먹는다. 디저트는 회원이 준비한 사과나 키위를 커피와 먹는다. 반찬을 나누고 배려하는 점심시간이 즐겁다.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야 서로를 알게 되는 친밀의 다리가 놓인다는 게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열정과 노력을 채색한 회원들의 그림을 찬찬히 감상하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수영장 갈 시간까지 다시 데생 연습을 한다. 화실에 나와 연필 선을 그으면서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저 그리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한 게 실물과 닮았다거나 보기 좋다는 말로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데생을 하면서 처음 나온 회원과 비교해도 선의 세밀함, 치밀함에 훨씬 못 미쳤고 정육면체나 구를 그려도 급하게 대충 완성하는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마는 거였다. 그동안 그린 그림은 수채화의 기초 지식 없이 운이 좋아 잘 그린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시쳇말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인 거다.
그림도 수영처럼 열심히 하면 근사치에 닿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와 소재를 택해 나의 그림을 그리는 경지에는 이를 거다. 묘사에 치중하기보다 그림의 분위기에 몰두해 나만의 색감으로 표현하면 그만 아닌가. 타인의 칭송이나 만족을 염두에 둔다는 사실이 얼마나 공허한가는 남의 눈치를 보게 되는 인식과 닮았다. 인정 욕망으로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조건임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우선으로 두는 건 개인의 신념과 확신에 따른 가치관이기에 존중받아 마땅할 거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삶의 목표로도 존중받는 사회가 잘 사는 사회다. 못 그린 그림은 없다. 그가 그린 그림은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글처럼 그림의 해석도 각자의 몫이다. 내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누가 부러 시킨다면 저항했을 거다.
선생이 지도한 이가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모두 문화예술회관으로 몰려갔다. 전시실은 6층, 수영장은 2층에 있다. 회화와 조형 작업으로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개척한 이의 작품이었다. 원형의 선과 작품마다 빠지지 않는 여인의 몸, 빨간 유두는 생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달과 푸른 동백 등 신화적 원형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든 작가의 세계는 인간 본연의 시원을 캐내려는 노력으로 비쳤다. 그림 해설이 옆에 붙은 건 옥에 티였다. 작가 메모는 보는 이의 상상과 사유를 설명에 가두는 꼴이었다. 차라리 제목만 붙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배우고 싶을 정도의 치밀한 구성이었다. 지역의 문화 수준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좀 넓은 곳에서 전시할 때는 부연 설명을 빼고 제목만 붙였으면 좋겠다. 작가의 해설은 도록에서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으니까. 때론 너무 친절하면 예의를 넘어 불편하다.
두 시가 되어 수영장에 갔다.
오후 시간엔 아는 얼굴이 없다. 혼자 레인을 차지하고 오가는데 웬일인지 힘이 나지 않는다. 고작 이백 미터를 왕복하고 지쳐버린다. 평소 오백 미터는 기본으로 하고 수영하다 내친김에 1km 수영을 했는데 맥이 풀린다. 수영은 힘든 운동이다. 곰곰 생각하니 섬에 내려와 석 달 내내 풀만 먹은 것 같다. 고기를 즐기지 않아서 기껏해야 돼지고기 몇 점 넣어 김치찌개를 끓이거나 배추 넣어 된장국이 전부였다 반찬이래야 집에서 보낸 김치와 젓갈, 두부와 계란 정도니 근력이 달리는 게 맞았다. 몸은 단백질 보충을 요구했다.
저녁 먹고 마트에 가서 생닭을 사다 황기 넣고 고왔다. 한 이틀 고기와 국물을 먹겠다. 우유도 샀다. 오늘은 백숙 먹었다고 오백 미터를 서너 번 왕복하고 집에 와서 뻗어버렸다. 수영 고수 K가 풀을 나와 샤워장에 간 후에도 혼자 레인을 돌았으니 무리했던 거다. 닭고기 믿고 달렸던 게 지나쳤다. 내일부터 적당량의 운동으로 몸을 달래야겠다.
사실 소질은 누구에게나 있거나 없다.
마음이 이끌리는 쪽이 소질이다. 그걸 갈고닦는 구 할의 노력이 소질의 완성이다. 열정이 범박함을 벗겨내는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형질의 소질이라도 묵혀 두면 원석으로 흙 속에 묻혀버린다. 없는 소질도 계발하면 일가(一家)의 근사치에는 이를 거라고 믿는다. 소질과 유사한 것 중에 인식 체계가 있다. 패러다임은 소질처럼 본래 타고나는 게 아니다. 앎과 깨달음의 반복을 거듭해야 얻을 수 있는 세계관이다.
삶의 파토스를 죽음과도 바꾸는 인간은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라 살랑이는 가을바람 한 줄기에도 마야인이 쌓은 견고한 석축 같은 가치관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배신과 변절이 그것이다. 변화와 성장이 인간의 속성이지만 앎과 성찰로도 변화의 선택을 제대로 짚지 못하면 변절이 된다. 변절은 정신의 부패고 자기기만이다. 앎은 책임을 동반하는데 숱한 역사의 과정에서 우리는 부패의 흔적을 만난다. 나는 변화와 성장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