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수영장과 화실을 오갈 때 벚꽃길을 돌아서 간다.
피기 시작한 벚꽃이 해안도로를 꽃 터널로 만들었다. 앞서 핀 수선화와 동백, 벚꽃이 한자리에서 봄바다와 어울려 풍경을 연출한다.
일본 시인 카지이 모토지로오(梶井基次郎)는 「벚나무 밑에는(桜の樹の下には)」이라는 시에서 벚나무 아래에 시체가 있다고 말한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이건 믿어도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벚꽃이 저렇게나 멋들어지게 피다니 믿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저 아름다움이 믿을 수 없어서 요 이삼일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드디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이건 믿어도 되는 말이다......'
아름다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미학적 인식이다. 생명과 죽음, 미와 추는 인류가 만들어낸 습속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불편하고 성가신 것, 더럽고 불결하다고 인식되는 건 추하고 평온하고 이쁜 것, 부드럽고 따스한 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내포된 진실과 거리가 있는 외연의 모습이다.
해방되고 이듬해 봄 벚꽃이 피자 성난 주민이 제주 관덕정의 벚나무를 도끼로 찍었다. 사람들은 나무가 무슨 죄냐며 말렸다.
제주 4•3 항쟁이 일어났을 때 관덕정 마당에는 화사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토벌대의 사무실로 쓰던 제주 관덕정 마당에 사살한 빨치산의 주검이 널렸고 머리를 잘라 공중에 매달았다. 그 아래를 두 눈 질끈 감고 지나는 사람의 머리 위에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강원도 살 때 구십 넘은 할머니는 한국전쟁 중이던 어느 봄날 고사리를 꺾으러 마을 뒷산에 올랐을 때 고사리 밭에 썩어가는 인민군의 주검을 똑똑히 기억한다.
죽음과 생명의 탄생은 불가분의 관계다. 사멸하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구는 일찌감치 차가운 별로 식었을 거다. 빛과 어둠 또한 함께 존재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사진과 회화는 이쁜 것, 좋은 풍경을 담으려고 애쓴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花样年华,指人生中美好快乐的时光)을 말하지만 아름다울수록 즐거울수록 어둠의 그늘이 짙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명은 유한하고 지금 누리는 행복은 불안의 시종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꽃구경하느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나무 아래서 사진을 박아댄다. 하지만 다른 편에선 하청 노동자가, 외국인 노동자가 죽어나고 가난에 떠밀린 사람들이, 청년들과 노인들이 희망 없는 노동에 꽃보다 귀한 청춘과 노년을 바치고 있다. 선진국의 풍요와 부는 식민 제국주의 시절부터, 멀리는 노예 쟁탈로부터 비롯된 건데, 기후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유럽과 북반구에 사는데 피해와 가난은 적도 아래쪽의 사람들이 겪고 있다. 70억 인구가 먹고 남을 식량을 생산하는데도 수천 만이 기아와 질병에 죽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생산하는 곡물의 반은 고기를 먹기 위한 동물의 대량 사육에 쓰인다. 거기엔 남획으로 잡은 바다의 치어도 섞여 있다.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우수한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이념이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죽이는 데 일조하는 이상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인권에 동의하면서 우리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건 목숨 걸고 막아낸다.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미안하지만 내 코가 석 자라고 외면한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정당하게 벌었으니 당당하게 쓰겠다는 심보는 무지한 소치다. 내가 벌어들인 재물은 타인의 노동과 타인이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 기간 시설에 힘입은 바 크다. 맨땅에서 고기가 든 그물을 거두는 인간은 없다. 하물며 비와 바람, 햇볕과 땅에 빌붙지 않고 이룰 수 있는 부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만에 찬 편견을 휘두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권의 떡고물을 나누는 데 날밤 새는 사람들은 호시절을 자자손손 대대로 누릴 궁리에 골몰한다. 대중은 남의 잔치 구경에 반은 밑도 끝도 없이 들뜨고 반은 신물 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변화는 혁명처럼 점령군의 깃발로 하루아침에 다가오지 않는다. 무혈혁명이나 총칼로 뒤엉킨 피의 혁명도 우리 시대엔 더 이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역사는 늘 정주행으로 진일보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한다. 푸틴의 호전성은 자국 주의를 앞세워 민간인과 거주지에 미사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KGB 출신이다. 정보 전략에 능하다고 해도 그의 가치관이 인류 보편성에서 벗어나면 편협한 사고에 빠지고 만다. 히틀러도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빌미로 유태인과 소수자, 반체제 정치인을 가두고 가스실로 보냈다. 우리 현실을 보면 뭔가 어긋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늦은 걸음으로라도 조금씩 진일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의 세계관을 여러 차례 걸쳐서 확인한 바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질 수 없다. 느닷없는 깨달음인 돈오(頓悟)는 무릎뼈가 녹아버릴 정도의 수양을 통과한 자가 얻는 성찰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한다. 길에서 오줌 싸는 술단지가 어느 날 갑자기 신선이 될 리는 없다. 대중은 좋은 사람의 쓴소리에 귀를 열지만 나쁜 사람의 좋은 말에는 귀를 닫는다.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했지만 우리는 껍데기와 알맹이를 분별하지 못한 채 어울려 사는 시절 연가를 부르며 산다.
벚꽃길을 가다 보면 매일같이 나와 떨어진 동백꽃을 쓰는 청소부가 있다.
그는 꽃에게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보다 꽃비 맞으며 꽃을 쓸어 담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의 시선에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고단한 노동으로 비친다면 꽃에게나 그에게나 해말간 눈으로 꽃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나 슬픈 일이다. 닥치고 꽃구경은 생각해볼 일이다. 눈앞의 꽃을 바라보며 죽기에는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든다. 자유로운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