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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18. 2022

단상

단상

우포 늪의 늦가을 그림을 얻었다.

보자마자 그리고 싶었고 초록 풀이 무성한 여름으로 그리고 싶었다. 구도는 단순해서 스케치하는 데 시간이 들지 않았다. green 계통의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머지를 채워 나갔다. 우포 늪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이 내내 맴돌았다. 수영장에서 양팔을 돌리는데 숨이 가빴다. 하루 쉬었다고 그새 몸이 굳은 탓일까. 레인을 오가며 동작을 다듬고 되새기는 동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공기를 짧게 마신 거였다. 마음이 급한 거였다. 이후로 수월하게 1km를 헤엄쳤다. 해안 산책로를 돌아 집으로 오면서도 그림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뭐가 잘못된 걸까.


집에 오자마자 펜으로 우포 늪을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늦가을 풍경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스케치를 마치고 색연필로 채워나갔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화실에서 그린 그림은 가짜였다. 머릿속으로 늪의 여름을 상상해 그렸지만 오류투성이 그림이었다.

그림을 배우는 입장에서 실수는 인정할 수 있다. 구도가 어긋나거나 비율이 맞지 않거나 색감이 어울리지 않는 등의 미숙함은 계속 그려 나가면서 자연스레 터득하거나 고칠 수 있다.

그림은 그림다워야 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관찰을 소홀히 하거나 빠뜨리면 오류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여름 풍경은 온통 풀로 뒤덮여 있다. 정말 다른 색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초록 일색이다. 오죽하면 시인 이상(李箱)은 농촌의 여름에서 삶의 '권태'를 느꼈겠는가. 지구는 밖에서 보면 초록 행성이다. 광합성이 없다면 대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식물과 동물, 여타의 생명체는 아예 살지 못하는 죽은 별이 되었을 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스케치와 채색 등 그리는 과정에서의 미숙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현실 상황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가을은 가을이고 여름은 여름이다. 불 끄고 누웠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싸 두었던 박스에서 종이와 화판을 꺼내 스케치를 시작했다. 역시 간단히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커피를 밀어 넣으며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오류를 인정하며 비 오기 전의 매지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우중충한 먼산, 비를 예상해 우렁 잡이에 나가지 않아 물가에 잠든 배를 그렸다. 사물과 풍경을 사진처럼 그리는 극사실주의인 photo-realism은 물질문명에 대한 고발의 메시지를 닮기도 하지만 취미 미술의 경우 닮게 그린다는 데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이 그리려면 사진을 찍는 게 효율적이다.


어쨌든 그림은 그림다워야 한다. 잘못 표현된 그림은 있어도 못 그린 그림은 없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의식이 깃든다. 대상을 포착하고 종이 위에 표현하기까지 지난한 숙성의 과정을 거친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삶의 사유는 닮았다. 국화빵 찍어내듯 똑같은 공장의 상품이나 진부한 클리셰(cliche')는 흔한 삶을 떠오르게 한다. 요즘은 짧은 사유를 선호한다. 긴 글을 읽지 않는다. 광고 카피 같은 찰나적 쾌락에 익숙하니 책을 읽어도 문해력은 가뭇하다. 돋보기를 안고 사는 내 경우엔 자잘한 글씨는 포기한다. 듣보잡이 보짱 편한 때도 있다. 삶이 그럼에야 무슨 사족을 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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