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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18. 2022

단상

단상

전화 안 하는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할아버지가 통화하고 싶다는 거였다. 아침에 톡으로 할아버지 아내의 부음을 들었다. 심장 질환을 앓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B군에 있었다면 달려갔을 터였다. 장례식장에 간 아내에게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통화를 청한 거였다. 아들 생각이 난 걸까. 구십을 바라보는 노인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노인은 정리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고 난 올라가면 찾아뵙겠다고 했다.


서울 살던 노인은 스무 해 전 B군에 정착했다. 농가와 밭을 사서 내외가 농사짓고 노인은 틈틈이 일을 나갔다. 도시에서 오랫동안 운전을 했다고 했다. 노인에겐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혼 후 시골로 내려왔다. 어느 해 겨울 노인과 아들, 셋이서 내가 산판 일하며 보아두었던 개울로 개구리 잡이를 갔다. 얼음장을 깨고 데꼬를 흔들어 바위 밑에 잠자는 개구리를 깨웠다. 라면을 삶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노인의 아들은 당뇨가 심했는데 합병증으로 시력이 나빠지고 있었다. 아들에겐 딸이 있었는데 가끔 아빠를 보러 다니러 갔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내가 강원도로 떠난 후 한 번 통화했는지 기억이 가뭇하다. 그동안 병이 깊어진 아들이 죽었다. 내가 다시 B군으로 돌아와 노인의 고추밭에서 고추를 땄던 기억이 몇 년 전이다. 가끔 노인을 생각하면 자주 뵙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었는데 통화하고 나니  마음이 더 커졌다.


노인은 나를 볼 때마다 '좋은 사람'이라고 침을 튀기며 치켜세웠다. 나이 들수록 '좋은' 것과는 멀어지고 있는 참이어서 부끄러웠다. 내장을 뒤집어 까보이면 코를 쥐고 달아날지 모를 일이다. 아내는 앞으로 노인이 살 날을 걱정했다. 구십 노인이 혼자서 밥 끓이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인가. 더구나 평생 해로한 아내가 죽었으니 상심이야 물론이지만 일상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올 거다. 집을 처분하고 양로원으로 주거를 옮기는 게 현명할 일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주위 사람들의 염려는 염려 대로이고 노인의 바람대로 따라주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죽는다. 예외적인 존재는 신뿐이다. 존재의 상실감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린다. 다시 한번 영원한 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노인의 배우자는 단순한 부부 관계를 떠나 안전장치다. 서로의 늙음과 건강을 챙기는 이는 배우자가 제일이다. 부모가 병들면 자식은 '시설'을 먼저 떠올린다. 시설은 자본주의 사회가 발명한 진화된 고려장이다. 생명의 단절에 순서는 없다. 젖을 물려 자신의 생명을 지킨 어미라도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로 추락한 게 오늘의 노인이다. 어떤 어미는 새끼를 버리기도 하는 게 현실임은 물론이다. 국가는 노인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기지만 노인의 빈곤과 고독, 질병에 더해 무위감(無爲感)은 세상을 등지게 한다. 나는 오두막에서 스콧 니어링처럼 세상과 결별하고 싶지만 그건 정신 맑을 때의 바람일 뿐이다. 만약 치매가 오면 내가 누군지 모르며 어디로 끌고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멋진 이별은 일부 사람들의 이벤트가 되었다. 늘어난 수명을 저주하며 살아내는 노인의 말년은 가혹하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날 떠올린 노인의 심정을 생각하니 가슴 먹먹해져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난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묵은 때처럼 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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