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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27. 2022

잡문

杂文(315)


구름 사이 언뜻 해가 비치자 집안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마당으로 옮겼다.

놀고먹는 신세가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다. 보송보송 개켜놓은 빨래는 일에서 돌아온 아내의 짜증을 정갈하게 접어놓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하늘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금세 밥 굶은 시어미 얼굴로 변하더니 장대 같은 빗줄기가 양철지붕을 두드린다. 니기미, 이게 무슨 꼴이람. 허둥지둥 등을 때리는 비를 맞으며 처마 밑으로 옮겼다가 도로 집안으로 철수한다. 쿠르릉 속 뒤집히는 소리를 내며 노드리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 결에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로 바뀐다.


봄부터 가물 타던 날씨는 섬에서 올라오자마자 장맛비로 변했다. 밤새도록 퍼붓다가 아침이면 소강상태로, 다시 한낮이나 저녁이나 무시로 게릴라 총질하듯 쏟아졌다. 건기와 우기가 자리 잡은 걸까. 한파와 가뭄, 집중 호우는 갈피를 잡을 새 없이 인간을 괴롭힌다. 동해에서 잡히던 오징어가 서해에 나타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중 생물이 호소(湖沼)를 뒤덮는다. 울울창창 푸르게 강산을 지키던 소나무는 시뻘겋게 타들어가며 돌연한 죽음을 맞는다. 어릴 적 사회 과목에서 배웠던 지방 별 과수 재배는 옛말이 되었다  열대 과일이 자라고 사과의 집산지는 자꾸 북상 중이다. 생태가 뒤엉키면 교란을 부른다. 교란(攪亂)은 마음이나 상황이 뒤흔들리는 걸 뜻한다. 마음은 다스린다지만 상황은 외부의 환경이다.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쉽게 동요하고 흔들린다. 어르신의 지혜와 덕담은 전설이 된 지 오래다. 그들도 시대의 물결에 부대끼는 외롭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수영장에서 구십 분 수영을 했다. 몸 풀기 십여 분 후엔 줄창 장거리 수영이다. 이십 분, 삼십 분 간격으로 1, 2킬로를 달리면 어느새 퇴장 시간이 가깝다. 오전 풀은 한가해서 좋다. 혼자 레인을 차지하고 맘껏 물을 헤친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변한 건 수영과 그림이다. 그게 내부의 변화라면 외부는 선거와 날씨였다. 선거 이후 뉴스와 담쌓고 살지만 먹고사는 존재인 터에 눈귀 닫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빨갱이 타령을 하는 사람은 좋은 세상 만났다고 히죽대지만 반대편은 죽을 맛이다. 분통이 터지고 억울한 심정에 허공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야 산다. 민심은 천심이란 개도 안 씹어먹을 말은 미디어 환경이 뒤집어놓았다. 언론과 검찰, 종편과 가짜 뉴스는 민심을 조작하고 인민의 미래를 조져놓았다.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민심은 가짜다.


집에 온 지 나흘이 지났는데 여전히 정리 중이다. 방과 창고, 뒤란의 부스러기를 버리고 비운 건 외부의 정리라면 내부의 마음 정리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루틴이 돼버린 수영은 빼더라도 책과 그림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멍 때리기 일쑤다. 반년 독거 생활의 후유증인가. 책을 버리고 미술 도구를 책장에 정리하고 이젤을 구석에 세웠다. 독서대는 침대 머리맡에 놓았지만 책은 덮은 채다. 섬의 화실에서 방에서 숙제처럼 해치우던 그림 그리기는 뜸만 들이고 있다.


비는 삼십 분 내렸다가 한 시간 멈춤 하길 반복한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 애간장 다 녹아나겠다. 오래전 여름 비가 줄창 내렸다. 풀베기를 시작한 지 며칠 지나자 한 달 넘게 비가 쏟아져 줄곧 일을 쉬었다. 오죽하면 기청(祈晴) 사설을 쓸 정도였다.


기청 사설(祈晴 辭說)


유세차 임오년 칠월 엿새 해동성국 봉화 땅에 하예 작업(下刈作業) 벌어지니 우리네 먹는 일이 산신령님 음덕이라. 일월산 장군봉에 비 맞고 올라와서 변변찮게 차린 음식 산해진미라 여기시고 어여삐 보살피사 우리네 축문 들어주소.


마른장마 건듯 가고 땃땃하던 초복 더위 수박 쪼개 먹었단 말

옛말로나 들리겠소. 오늘 오는 이 빗줄기 열흘 동안 내리시다니 삼복더위 건너뛰고 입추로 문을 여니 내일이면 칠석인데 이제 그만 멈춰주소. 삼라만상 우주 이치 인생유전 새옹지마 오작교 견우직녀 슬피 우는 까마귀 떼 인정물태 야박하여 내일도 비 오시면 가여운 졸대기들 두름으로 굶어 죽소. 오뉴월 소불알이 주야장천 늘어져도 저녁 굶은 시어미가 돌아앉아 골을 내도 우리네 천한 것들 먹는 입이 포도청이라. 삼수갑산 구경 가도 배불러야 살지 않소. 올해 농사 그만하면 논물 밭 물 충분하니 앞으로는 하늘 걷어

맑은 하늘 열게 하소.


오다 보니 어떤 놈은 우중에 비를 쓰고 풀 베는 꼴 보았댔소. 돈에 환장했나 서방질에 날밤 새나 떡갈나무 신령님 전 조아리고 비옵나니

청천 하늘 길 열리고 여윈 삭신 추슬러서 불끈불끈 일 하도록 천지신명 보살피소. 구르는 돌 하나라도 우주만물 이치거늘 조림묘목 살린다고 낫 갈고 칼 들어서 에멜무지 잡초라고 싹둑싹둑 베는 마음 내 어찌 편하리오. 사방천지 만상객물 안갯 속에 묻혔으니 칭칭 얽힌 만경 속의 우리 인생 닮았구나. 쾌도난마 결자해지 시원스레

끊어내서 그늘진 측은중생 만복 화락 비나이다. 혀짤배기 까치독사 물고 쏘는 고무 땡삐 팡팡 튀는 돌서덜에 자빠지고 넘어지고 우리 인생 고달프다. 제발일랑 몸 성하게 소지하며 비옵나니 하나부터 열 끝까지 안전하게 보살피소. 자작나무 내린 이슬 풀 섶에 묵은 근심 늦더위 햇발 아래 훠이훠이 말라버려 고단한 육신으로 벌어먹는 우리 것들 맘 편하게 사는 세상 열리도록 도와주소.


멀리 보이는 만경창파 동해 바다 푸른 물에 뛰어놀던 오징어를 잘근 씹어 음복하니 누런 얼굴 돌아오고 산판 신명 절로 난다. 오늘 공수 헛공수라 가는 길이 허전해도 가을 추석 오기까지 산판 일감 점점 층층 안다미로 그득 채워 한가윗날 배부르고 술 부르게 하여 주소. 청산녹수 우거진 골 재삼재사 비옵나니 적도 상공 중국 대륙 불어 치는 비바람을 근원부터 쓸어내어 평사낙안 푸른 하늘 활짝 열어 주시옵고 청정 지역 봉화 땅에 뿌리박고 사는 목숨 안빈낙도할 수 있게 세세만년 보살피소서 상향.

[2006.7]


창세기 노아의 홍수처럼 사십여 일을 비가 내리자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돌아왔다. 식구들은 여름 내 고기 한 번 씹지 못하고 그해 여름을 났다. 빨래는 고사하고 짜증이 난다. 하늘은 뭐든지 인간의 바람대로 적당히는 없다. 하늘의 뜻이라니 어쩔 수 없지만 사실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저지레가 초래한 공산이 크다. 문명의 부조화는 전쟁뿐만 아니라 기후와 식량 위기를 부른다. 문명의 부조화는 문화의 부조화이기도 하다. 범박하게 말해 문명이 이성과 과학의 발달이라면 문화는 삶의 패러다임에 내재한 정신의 가치인데, 우리의 인식 체계는 지구의 멸망을 초래할 위기까지 밀려온 느낌이다.


배곯아도 제대로 먹고 쌀 일이다. 쿠르릉 쿠르릉 잠시 머춤하던 하늘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매지구름은 종일 읍내를 이불처럼 덮고 다닌다. 젊어 오입할 적 얼음 바람 쏘이며 불나게 들락거리던 솔수펑이 희롱하던 물구덩이 썩어 자빠지고도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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