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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26. 2022

잡감

杂感


아내를 보낸 노인은 고추밭만 보면 눈이 젖는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다. 추수 끝나면 일 중독인 아내를 도시 딸네 보내서라도 농사일과의 인연을 끊으리라 이를 부딪치며 다짐했다. 시골에서 땅을 놀리는 일은 죄고 뭐라도 심으면 가꾸고 거둬야 한다.


마지막이라고 약속한 땅에 고추를 심고 참깨 두 마지기, 콩과 들깨를 심었다. 고추에 진딧물 약을 치고 가문 고랑에 물을 댔다. 시든 이파리가 서풋서풋 살아날 무렵 콩밭 매다 점심 차리러 먼저 내려간 아내가 밭터서리에 쓰러졌다. 119를 부르고 병원에 달려간 며칠이 아득하다. 잠깐 깬 아내는 바이러스 때문에 손도 잡지 못하고 영영 이별이었다. 아들이 달려오고 딸과 사위는 홀로 된 노인을 염려하여 눌러앉았다. 자식도 늙었다. 마당에 그늘을 만들던 호두나무 초록 열매가 주렁 하게 달렸는데 아내 없는 풍경은 이 빠진 그릇처럼 공허하다. 병풍처럼 집 뒤로 둘러친 밭만 점점 초록으로 덮일 뿐이다.


마당에서 놀던 고양이가 또 새끼를 쳤다. 목숨 가진 것들은 번식하고 사멸한다. 그게 사물의 이치고 인연인데 육십 년을 함께 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존재가 무화(無化)되었다는 현실이 무언가 억울하기도 하다. 무슨 영화를 본다고 해마다 죽어라 흙을 뒤집고 고추를 따고 깨를 털었는지 종시 가뭇하다. 그저 생래적으로 타고난 흙 버러지처럼 살았던 게 아쉽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심고 풀 뽑고 거두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있었나.


노인은 심어 놓고 떠난 사람이 야속하다. 자식 같은 저 푸르댕댕한 것들을 놔두고 어찌 한 마디 없이 산을 넘는단 말인가. 어정대며 둘러봐도 저것들을 내버려 둘 순 없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수가 나지 않는다. 엊그제 교인이 다니러 왔을 때 수확을 부탁했다. 이문을 반씩 나눌 요량으로 조심스레 사정했지만 상대는 당황하는 빛이 뚜렷했다. 모두 생업에 바쁜 데다 나이 들어 한 번 품앗이는 몰라도 세 물, 네 물 여름부터 가을까지 끝없이 달리는 붉은 고추를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농사 중에서 제일 힘든 농사가 고추 농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만 이뤄지지만 시세는 해마다 천정부지로 올라 쏠쏠하다. 따기만 하면 다 되는가. 씻어 건조기에 넣어 찌고 말리고 건사하는 과정은 말 그대로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이다. 저대로 썩어 자빠지도록 놔두기엔 아내에게 미안하고 무엇보다 가물을 견디고 이파리를 내민 고추에게 못할 짓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공연한 집착 같기도 하다. 세상없어도 눈 질끈 감으면 비우고 버리고 떠나는 게 산 것들의 운명 아닌가. 사람 목숨과 푸른 것들의 목숨과 견줄 순 없어도 머리 검은 짐승의 이치가 먼저 아닌가. 다 때려치우고 노인의 살길을 도모하는 게 바른 일일지 몰랐다. 땅을 처분하고 읍내의 깔끔한 아파트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딸이 같이 살겠다고 하는 건 고맙지만 여적지 내외 둘이 산 습속에 익숙해서 누구의 간섭이나 손을 타는 게 마뜩지 않다. 얼마를 더 산다고 땅에 작물에 집착하는 게 미욱한 처사인지 모르겠다. 사춘기에 전쟁을 겪고 도시에서 운전수로 살아오며 볼 꼴 못 볼 꼴 숱하게 겪다 육십 넘어 시골에 들어왔다. 늙어 빠진 촌로가 되어 무슨 걱정을 달고 끌탕하는지 모를 일이다.


내 생각과 다른 자식, 교인의 말을 들어야 할지 종내 갈피가 분분하다.

단비 같은 소나기 쏟아지고 때 이른 폭염주의보로 후끈 달아오는 이천 평 드넓은 고추는 가물을 견디고 섶을 키운다. 출렁이는 초록 물결 사이로 등 굽은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호두나무 아래 나무 의자에 기댄 노인의 눈이 점점 감기는데 자벌레가 노인의 실 풀린 남방 위로 몸을 구부렸다 폈다 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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