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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l 04. 2022

단상

단상

'사건'이란 "그것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어떤 구부러짐(곡절)을 만드는 경우"로 이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할 때 변화는 가능하다. 반면에 '사고'는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게 수습하려 하고 그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차이를 최소화할 때"의 경우이다. 따라서 똑같은 일이라도 그것을 '사고'로 부정할 때는 삶의 필연적인 불행이 되지만, 그것을 '사건'으로 긍정할 때는 삶의 필연적인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운과 불운은 어떤 차이일까.

자갈을 씹어먹던 시절에는 운명이란 단어를 믿지 않았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며 헤쳐나가는 장애물 정도로 여겼다. 나이 든 지금도 운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삶에 운이 어느 정도 작용한다는 건 믿게 되었다. 물론 그 운이란 것도 자신이 해석하기에 달렸다. 경험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지만 경험을 하는 모든 인간이 변화하는 건 아니다. 단단한 습속과 인식으로 무장한 인간은 숱한 경험을 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에게 변화와 성장은 그만큼 먼 가치가 된다. 인식을 바꾼다고 당장 새로운 세상이 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식을 바꿈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날 가능성은 커지는 거다. 진인사대천명의 '하늘'은 사실 없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도 가짜다. 자신의 의지로 버텨내는 것일 뿐, 고통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 맞다.


섬에서 섬으로 가려고 한 적 있었다.

내가 머문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뭍과 다름없지만 가려던 섬은 배 타고 들어가야 했다. 삼십 년 전 방송국 초청으로 가보았던 섬이었다. 처음 먹었던 삼치회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고 방파제에서 노래미를 엄청 낚았던 기억이다.

론부터 말하자면 입도(入島) 계획은 접어야 했다. 집으로 복귀할 날은 다가오고 섬사람의 형편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진작 말 나왔을 때 결행했어야 했다. 섬사람을 다시 만날 기회는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를 만난 건 강원도 주문진이었다. 부부가 살던 곳을 떠나 아내의 고향인 섬으로 가기 열흘 전이었다. 섬에는 몇 해 전 남편이 심어놓은 황철나무가 자란다고 했다. 활엽수와 침엽수의 전정 방법이 다르긴 해도 내게 나무 가지치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남자는 퇴직하면 처가에 내려가 나무를 키우며 살겠다고 했다. 급한 개인 교습으로 가지치기를 전수했다. 영민한 남자는 하나를 배우면 서너 걸음을 앞섰다. 속성으로 전정을 배우고 밤바다에 나갔다. 바께쓰를 들고 따라나섰는데 그는 헤드랜턴을 비추며 뜰채로 방파제 돌 틈에서 돌게를 잡아냈다. 빛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게가 속속 고개를 내밀었다. 신박한 솜씨였다. 집에 가져와 돌게장을 담았더니 아내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맛나게 먹었다. 며칠 후 그와 부인은 섬으로 떠났다. 얼마 후 나도 바다 마을을 떠나 내륙의 처갓동네로 들어갔다.


부부는 모두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렇다고 이별 이전의 고통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 참이었다. 내가 반년의 섬 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들은 건 남자의 아내가 많이 아프다는 거였다.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병의 치료를 겸한 거였다. 모두의 바람과 달리 병은 점점 깊어진 모양이었다. 남자가 섬에 살던 내게 안부를 묻고 섬에 있다고 하니 한 번 놀러 오란 거였고 차일피일 미루다 연락했을 땐 그의 아내는 다시 치료를 위해 입원한 터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언젠가 집에 있을 때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좋은 골짜기 있으면 점찍어 두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니 부부의 사정이 헤아려졌다. 만남의 가능성이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술꾼이 계급장 달고 질주하는 것처럼 운은 평범과 비범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운이 솟아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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