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견과 토종의 혈통이 섞인 개는 진도견의 지질한 성격과 잡종의 영리한 품성이 골고루 섞였다. 더우면 스스로 물에 들어가 털을 적시면서 목욕은 죽어라 싫어한다. 주인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다. 한 번은 목욕시키러 개울에 나갔다가 죽는소리를 내는 통에 포기했다. 놀러 나온 사람들은 개 잡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밥그릇에 주인의 손길이건 똥파리가 얼씬대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남이 제 몸을 쓰다듬는 걸 끔찍하게 여긴다. 녀석의 개 같은 성질이 날 닮은 건 아닌가 해서 녀석을 좋아한다. 제가 싫은 건 죽어도 싫어하는 성미다.
내가 녀석의 별명을 능참봉 네 멍첨지라고 붙였다. 진도견 순종의 뾰족한 삼각형 귀 대신 라운딩의 귓날은 차창 바람에 이파리처럼 팔랑거려 팔랑귀라고도 놀린다. 멍첨지가 식구 되기 전 우리 집 좁은 마당은 길냥이의 급식소였다.
아침마다 부지런한 새들이 날아와 지붕 위에 차려놓은 식탁에서 낟알을 배불리 쪼다 가곤 했다. 멍첨지는 제 영토에 파리, 나비 심지어 벌조차 침입하는 걸 극도로 혐오한다. 돼지 뼈를 뜯다가 파리가 날아오면 딱딱 이빨을 부딪치며 물려고 쫓아다닌다. 눈이 좋은 새들은 전깃줄에 앉아 마당의 신경질적인 폭군의 부재를 확인한 후라야 날아와 편하게 식사를 하고 간다. 영리한 고양이가 멍첨지의 감시가 소홀한 뒤란에서 새끼를 키우고 떠난 뒤로 우리 집 마당은 이웃집 담장에 올라간 고양이가 힐끗 들여다보는 정도가 되었다.
마당에서 배변을 보지 않는 멍첨지의 습성을 존중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나간다. 개에 의한 물림 사고와 민원이 잦은 세상이다. 맹견이건 체구가 작은 애완견이건 짐승은 인간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 방어와 공격 본능은 인간처럼 교활하지 못하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는 틀린 말이다. 순한 개가 예민하다. 인적이 많은 곳에선 줄과 입마개, 똥 봉지는 필수다. 그래야 인간 사회에서 개도 함께 살도록 허용했다.
매일 산책 코스를 고민하지만 제일 나은 건 사람이 없는 계곡이나 산을 뒤지는 거다. 차로 오 분 거리의 석천 계곡과 유치원 아이들의 숲 체험 코스인 '유아의 숲'을 자주 간다. 이곳에선 눈치를 살펴 멍첨지를 잠시 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시의 시선을 늑줄 주지 않고 팽팽하게 긴장하다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면 멍첨지를 불러 고리를 채운다. 유인하기 위해 간식을 넣고 가지만 제가 실컷 놀았다고 느끼면 순순히 다가온다. 어떤 때는 잡히기 싫어 장난치며 꼬리잡기 신공을 펼친다. 빙빙 돌며 공중을 나는 게 꼭 예선 탈락한 올림픽 체조선수 같다.
인간은 개와 반려 동물에게 애정과 배려를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하지만 이웃의 허기와 먼 나라 사람들의 전쟁의 공포 따윈 남의 일이다. 반려 동물은 일하지 않아도 비싼 먹거리를 먹이고 용품을 몸에 걸쳐준다. 하지만 생산성과 효율에서 쓸모가 사라진 노인을 보는 시선은 식충 벌레를 보는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 죽어라 일해도 가난을 벗을 길 없는 빈자에게는 자본주의 경쟁 사회이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시혜적 동정을 베푼다. 최소한의 연민이지 연대와 공감은 일찌감치 불 싸질러버린 지 오래다.
장시간 반복 노동으로 사회의 톱니가 굴러가는 이치를 알면서도 청소, 택배 노동자, 공장 노동자 알기를 개똥으로 안다. 거리에서 쓰레기 줍는 청소부를 보고 엄마는 아이에게 경고를 날린다. '공부 안 하면 커서 저런 꼴 나'라고. 공부 못하면 추우면 추운 데서 일하고 더운 날 더운 데서 일한다는 코미디의 소재는 인간 혐오가 깔린 위험한 사고다. 공동주택의 분리 수거함은 휴일 저녁이면 쓰레기로 넘친다. 월요일 아침 청소차에 매달린 청소부들은 썩은 물이 흐르는 쓰레기를 골라 담는다. 뒤이어 폐지 차가 따라오면 분리수거함은 정리된다. 어떤 인간은 먹던 치킨 상자를 그대로 버리기도 하고 부서진 가구를 한밤중에 슬쩍 버리고 간다. 함부로 버린 쓰레기는 청소부가 할 일이란 더러운 생각이다. 밑바닥 일을 해서 그런지 내 눈엔 그들의 고단한 삶이 보여 지나치지 못한다. 비루하고 초라한 건 노동이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세상의 시선이다.
비슷한 생각으로 자연은 인간과 공존하지만 인간은 만물에서 으뜸이니 자연을 보호, 관리, 통제하며 인간의 편리에 맞게 활용한다는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중심주의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에 견줘 젠더에까지 확장하는 건 논외로 치더라도 인간 중심의 사고는 지구를 멸망으로 모는 지름길이다. 나도 남성 중심의 사고를 지니고 여성과 약자에게 모진 가해자였다. 하찮은 지렁이가 모습을 감추면 생태는 무너진다. 꿈틀 하던 지렁이가 사라지는 세상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을 파헤치고 문명을 건설하고 흙에 제초제를 섞어 풀씨를 죽인다. 집단 사육한 동물의 분뇨로 만든 퇴비를 들판에 끼얹고 비가 오면 빗물에 쓸려 하천을 오염시킨다. 물고기는 사라지고 고동의 빈 껍데기만 뒹군다. 산사태로 펜션이 묻혀도 사람들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고 방법도 없다.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게 된 거다.
개는 자다가도 리드 줄을 흔들면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산책에 특화된 기질 탓이다. 바람의 방향을 읽고 공기 중에 섞인 안온하거나 불온한 기운을 알아챈다. 나무 기둥에 오줌을 갈기고 흙냄새 속에 고라니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한다. 노즈 워킹(nose working)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상 행위다. 한 번 본 친구나 스친 마을을 잊지 않는다. 묶여 사는 개는 불행한 인간과 닮았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주인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람에 섞인 고향의 냄새를 좇는 것이다. 동물의 촉각은 자는 중에도 쉼 없이 안테나를 돌린다.
인간은 물고기와 동물의 고통을 알아채지만 그들의 마음은 알지 못한다. 이성과 과학의 만능 시대에 인간이 겸손을 유지해야 하는 대목이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는 고통을 지각하는 구분이 권리의 기준이 된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의 동물 권리론자가 주장하는 형평성이란 동물에게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이 비슷하게 갖고 있는 이해관계를 공평하게 존중하자는 것이다. 고통만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혜택이 없다면,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고통의 주체가 어떤 종인 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