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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Oct 02. 2022

잡설

杂说(17)


신새벽에 집 나선다. 떨어진 기온 탓에 백미러에 낀 김을 손으로 문지르고 시동을 건다. 소읍은 청소차의 질주로 막 잠에서 깨는 중이다. 초록색 청소차의 뒤에 애인을 따라가듯 재활용 수집 트럭이 바싹 붙는다. 건설업자에게 뒷돈 처먹고 재판 중인 전 군수는 청소업체의 점심값을 챙겼다. 씨발, 점심 한 끼에 오백만 원이란다. 밥값이 오르긴 했다. 서민은 오른 밥값에 벌벌 떨고 도둑은 좋아한다. 청소업체는 노동권을 주장하던 가장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돈 먹은 군수는 변호사 무리를 앞세워 빠져나갈 궁리다.

천변 도로를 따라 창고로 간다.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이 팔을 흔들며 걷는다. 삶의 축복과 건강을 누리기를!


선득한 공기에서 가을을 맡는다. 창고 문을 열고 작업차의 히터를 켜고 동료를 기다린다. 군유림 임도(林道)의 풀을 치고 쓰러진 나무 베는 일이 한 달째다. 지도 앱으로 산의 지번을 찾아가며 임도를 관리한다. 이것도 한 달이면 끝난다. 땔감하는 사람처럼 다시 겨울 양식을 구하러 일자리 기웃거리고 일상은 잿빛으로 물든다. 주지 출타 중인 절 마당의 소나무를 손보니 보살이 음료수를 갖다 준다. 나이 든 보살에게 감사를 전하고 나머지 소나무도 이번 파수에 다듬기로 마음 먹는다. 부처의 자비는 보시와 가피(加被)가 중심이다. 그것들로 연을 맞는다면 중생도 고해도 사라질 터. 소백 산릉이 보이는 산사의 전경은 탁 트여 시원하다. 텃밭의 고추가 불콰하게 익어가고 바람이 마른 풀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일체의 번뇌와 소음이 멎은 듯 정신마저 진공 상태가 된다. 산삼 썩은 약수 보살의 물로 목 축이고 와랑와랑 예초기 돌리며 웃자란 풀의 모가지 사정 없이 베어낸다. 땀 흐르는 산정의 상수리나무 우듬지에 하얀 구름이 쉬었다 간다.


툭하면 장거리 수영이다.

몸 풀고 물에 들어가면 퐁당퐁당 물탕 튀는 옆 사람 볼 새 없이 쉬지 않고 레인을 왕복한다. 물 밖에 나가기 부끄러워 잠수 타듯 한 시간 내내 레인 돌다 물 털고 급하게 샤워장으로 간다. 수영하다 별별 생각 다 한다. 니 꼴 내 꼴 볼밖에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수영에만 집중하자 마음 먹는다. 장거리 수영하면 하품 나오고 오줌 마렵다. 자세에 신경 쓰지 못하면 어깨 통증은 절로 따라온다. 숨은 고개 돌려 천천히 길게 마신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질리도록 끈질기게 오래도록 레인을 탄다. 중간에 들어온 수영인이 나갈 때까지 돌고 또 돈다. 요새는 한 시간 수영이 루틴이 됐다. 죽음에 대한 미약한 저항으로 삼 키로를 가다보면 살아온 삶이 수면 위 떠오르고 지나온 흔적은 퉁퉁 불어터진다.


늦게 수영하길 잘했다. 삶도 글도 그림도 시들해진 판국에 물탕이라도 튀겨야 흩어진 정신줄 다잡겠다. 살다 살다 같잖은 양아치 새끼 나랏꼴 거꾸로 돌리는 꼬라지 토 나올 것 같은 마당에 멱살 흔들듯 물이라도 잡아 당겨야 속 풀리지. 잡년 잡놈의 궁궐놀이 속 뒤집어져. 똥 씹은이찍들 다음에도 니기미 날라리 끈질기게 밀어주겠지. 민심은 개뿔, 욕망의 패러다임은 헛방만 짚는다. 공동체와 개인 삶의 지고의 희망은 무엇일까. 다시금 공허해진다.


가문 탓에 버섯은 나지 않고 송이 값은 다락같이 오른다. 등외품이 웬만하면 고기 넣어 볶아 맛이라도 볼 텐데 올해는 글렀다. 문학 전시와 사진 전시에서 반가운 얼굴을 본다. 썰렁한 축제장을 둘러보고 만나기로 한 동료와 이른 저녁 푸지게 술을 펐다. 먹다 남은 튀김 닭 봉지를 달랑이며 간만에 취해 어두운 골목을 걸어 돌아왔다. 가로등에 비친 담쟁이 이파리가 아우성 치며 마른 벽을 기어 오른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죄 짓는 기분 들었다. 태어난 게 잘못의 시작이다. 삼 일 연휴라니 뭔가 벅차게 시간이 남아도는 기분이다.


아내는 이웃 아줌마들과 마지막 다슬기 잡으러 간다며 절대로 따라나서지 말라고 인상을 겁나게 쓴다. 나도 이참에 여름 내내 못 간 동해로 향했다. 해변 주차장에 잠수복 차림의 두 청년이 짠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자연산 섭이 가득이다. 옆구리 창에 찔린 쥐치도 보인다. 도마는 예수의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만지고 나서야 예수를 인정한다. 부활의 생명을 의심한 도마야말로 인문주의자다. 삶은 의혹과 질문이 요체다. 말을 거니 간단한 대답만 뱉는다. 청년은 꼰대가 불편하다. 너희도 살아 봐라. 난 물고기를 찔러 잡진 않을 거다. 나도 예전엔 생선을 찌르고 노인을 무시했다. 살아 보니 무시할 만하다. 보고 배울 게 없으니 청년들은 노인의 존재가 성가시다. 전망은 커녕 탐욕과 쾌락에 휩쓸리는 무리를 누가 좋아하랴. 박제된 삶은 먹방도 사절이다. 청년의 눈이 점점 좁아지다 사시가 된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지 모르겠다.


정오의 바다는 휑했으나 차츰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파란 하늘 아래 서핑 보드를 타는 청년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바다로 통하는 하천의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 물이 풍부해 물놀이에는 그만이다. 몸 풀고 팔을 저어 물살을 헤치니 찬물에 오그라든다. 잠수복을 입으니 냉기가 사라진다. 갯바위 쪽으로 헤엄쳐 참소라를 잡아 양파망에 넣는다. 물속에는 놀래미, 배도라치, 숭어 새끼가 떼로 몰려다닌다. 작살을 두고 왔지만 작살로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다. 저들도 그걸 아는지 내 곁을 맴돌며 도망가지 않는다. 수초는 사라지고 밤송이 닮은 보라성게가 지천이다. 바다의 생태계는 무너지는 중이다. 얼마 지나면 성게도 먹을 게 없어 줄어들지 모른다. 생명의 악순환이다. 성게는 여름 지나면 알도 졸아들어 잡지 않는다. 어부가 거랭이로 바닥을 긁어 조개를 잡았는지 조개가 안 보인다. 겨우 몇 개 잡고 참소라에 전념하기로 했다.


큼직한 털게가 바위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당황한다. 등판을 손으로 잡고 갈고리를 집게발에 대니 꽉 잡는다. 센 힘이 느껴지는 순간 녀석은 집게발을 떼어내고 달아난다. 떨어진 집게발은 여전히 갈고리를 물고 있다. 애꿎은 다리만 자른 셈이 됐다. 몸을 버리고 달아나는 게의 정신을 본받을지고! 참소라엔 살을 파먹은 게가 들어가 사는 게소라가 많았다. 손으로 떼면 빨판이 느껴지는 게 진짜고 게소라는 달아나려 몸을 뒤챈다. 참소라만 골라 담는다. 세 번째 물질에서 돌아오다 조개 밭을 발견했다. 해초를 문 놈은 드물어 까만 점 두 개의 숨구멍을 보고 밑을 파내 잡았다. 제법 굵은 놈도 나온다. 세 시간을 물에서 놀았다. 편의점 김밥과 초코바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두 냄비 양을 잡고 물통을 가져왔지만 씻고 옷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아 잠수복을 입은 채 집으로 향했다. 연휴를 즐기는 차량이 꼬리를 문다. 영원한 풍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질주가 아찔하게 스치며 바람을 일으킨다.


삶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기 같은 관계다. 그런데 정치역사는 얼마든지 거꾸로 흐를 수 있다는 걸 목도한다. 기도 안 차는 것들의 저지레가 연일 눈귀를 더럽힌다.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지록위마의 악마성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눈알을 파내고 혀를 끊어내고 뼈째 갈아버 짐승들이 칼춤을 춘다. 최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는 게 방법이라도 검사 왕국의 개판이 돼버린 지금의 상황은 상처가 아물어도 후유증이 크다. 골수에 박힌 욕망은 역사와 시대 인식을 어둡게 만들었다. 선량하고 무지한 인민을 개 돼지로 아는 것들이 공정과 자유로 위장한 방망이를 마구발방 휘두른다. 덩달아 취한 것들 컹컹 따라 짖으며 악 쓴다.

소신도 신념도 확신도 없는 삶이란 사나 마나 한 인생이다. 어쩌랴. 그래도 자식 키우고 이웃과 나누고 빼앗으며 독하게 산다. 어리석은 게 나 하나 뿐이랴. 어두운 수돗가에서 조개와 고동을 이웃과 나누었다. 헹궈 널어논 잠수복에서 눈물처럼 물이 떨어지며 바다 냄새가 난다. 삶도 마치맞게 서럽고 짭쪼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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