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说(24)
사람이 사는 건 잠깐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도 수많은 감정의 결이 사건을 일으키고 지나간다. 결코 만만치 않고 순탄하지 않은 과정이다. 당연하게도 지구는 사람의 입장이나 감정의 물결 따윈 애초에 안중에 없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생성되고 변화하고 성장하다 사라질 뿐이다. 지구의 생성이나 우주의 순환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믿는 건 순전히 인간의 상상이 빚은 결과다.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것과 인류의 발전에는 상당한 관계가 있다. 문명과 문화가 부침을 거듭하며 역사를 일궈냈다.
삶의 과정은 생성과 변화, 성장과 사멸이라는 키워드로 지나가는데 그게 좀 단순하지가 않다는 거다. 감정의 언어인 욕망과 고통의 부면에서 그러하다.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무언가 이루려는 것과 몸과 마음의 아픔이 지구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몫이고 모습이다. 기질적으로 우울감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생존에 대한 공허감이 지배하겠지만 인간은 눈을 감고 절벽 위에 선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습성을 지녔다. 삶에 대한 의혹에 대한 질문과 해결을 도모한 건 종교 지도자와 현자, 시인이었다. 하지만 매일 반복하는 감정의 물결은 그들의 말을 고대인의 점토판에 새겨진 판독 불가한 유물쯤으로 취급한다.
당장의 현실을 해석하기도 벅찬 현대인은 습속에 몸과 정신을 맡기는 게 외려 편안하게 느낄지 모른다. 시간이 무엇이라고 정의하긴 어렵다. 세월이 흐른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에 대해 명확한 해석이 어렵다. 단위로 쪼갠 시간에 따라 생명 활동을 이어간다. 그것이 습속이다. 언제부턴지 난 시계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항상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닌다. 시계를 보며 밥때가 됐다는 것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거나 막차를 놓칠 수 있겠다는 가늠을 한다. 달력도 마찬가지다. 생일을 기억하고 수험 날짜를 되새기며 긴장한다. 누군가의 시간이 정지되었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멎는 듯한 체험은 누구에게나 따라온다. 공동체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 중에 비중을 둔다면 어느 쪽이 중할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낄 뿐이다.
산에서 마른 가지를 모으고 화단의 시든 꽃을 걷어내고 바람에 깨진 뒤란으로 가는 유리문에 비닐을 붙이니 시간이 훌쩍 지난다. 점심 후엔 수영장에 갈 생각이다. 당분간 숏핀으로 종아리 근육을 키우리라 다짐한다. 모든 게 시간과 함께 계획하고 이루어진다. 화성의 탐사선은 당초의 목표보다 오랜 시간을 활동할 거란다. 지구인은 로봇이 전송한 사진을 분석하느라 머리가 센다. 권력을 거머쥔 자는 과거의 시간을 소환해 구속한다. 그들에게 공동체의 미래는 안중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시도 때도 없이 우려 먹는 공정과 자유는 그들만의 상식인 걸로 드러났다. 그들이 외치는 연대는 권력을 쥔 무당의 연대고 칼춤이다.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겨울부터 봄을 지나 여름 중간까지 밥을 벌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또 임도 작업이 걸릴지 모른다. 죽으나 사나 기간제 일자리 전전하는 것도 앞으로 오 년 남았다. 일은 하기 싫은데 연금이 적으니 벌어야 움직인다. 연금으로 사는 사람은 여가를 어찌 보내는지 궁금하다. 아돌프 포르트만은 '평소에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는 삶에 의미 따윈 없다고 할지 모른다.
폴 투르니에는 「노년의 의미」 에서 '개인적으로 여가 시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여가의 상업화와 유행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인간의 본성까지 더해져서 오늘날에는 여가마저 대중적인 소비재가 되어, 여가활동이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할 때만큼이나 단조롭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은퇴자가 이렇게 강요된 자유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따분하고 지루해한다. 상상력의 부족으로, 훈련의 부족으로 습관화되지 않아 많은 은퇴자가 되는대로 살아가며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점점 권태의 덫에 빠져들어, 결국에는 새로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주변 사람들까지 따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무력한 삶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마음 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에 깨닫지 못한 이유는, 매일 반복되던 노동과 사회생활이 개인적인 삶의 공허함을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자유를 원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자유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함부르크 대학교 의대 교수, 아르투르 요레스와 H.G.푸흐타는 "놀랍게도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노후는 커녕 여가 생활을 밥을 버느라 허덕인다. 그런 중에도 연애를 했고 그림을 그리고 틈만 나면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나의 형편은 그들보다 나은가. 그저 밥을 벌고 시간을 쪼개 딴 궁리를 하는 게 내 삶이고 여가 생활이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멎으면 내 위주로 돌아가던 모든 세계는 무화되고 시간은 다른 이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부풀리기도 한다. 그런게 일생이라 생각하니 거짓을 참으로 포장하고 핏대 올리는 것들이 같잖게 보인다. 고통과 복락조차 시간에 포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