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격리 생활 오 일째.
딸은 슬슬 답답증이 이는가 보다. 수시로 주고받는 톡에서 짜증을 나타냈다. 자신을 환자 취급하고 가둬놓는 상태가 불만이다. 하나 어쩌랴 바꾸어 생각하면 환자와 비환자의 입장은 누구라도 뒤바뀔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시선은 그래서 폭력적이고 위험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십사일의 격리 기간을 마치고 재검진 후 음성 판명이 나면 비로소 외출이 자유롭게 되는 거다. 사스와 메르스를 거치며 바이러스가 공동체에 미치는 불행한 파급력은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교만하고 나약한가. 바이러스의 공포가 사라지자 일상은 전처럼 돌아갔다. 과학 만능의 시대에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출현은 이젠 일상이 되었다. 인류는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쓰러진다.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 파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삶의 방식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중세의 페스트, 이십 세기 초 스페인 독감, 중동의 사스와 메르스, 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와 함께 동물에 치명적인 조류 독감과 구제역, 돼지 열병 등은 무시로 인간 사회를 위협한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 없이 비닐에 싸여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주검들과, 비명 지르며 생매장당하는 돼지 떼가 겹쳐 떠오른다.
휴양림 기간제 관리는 삼 교대다.
오전과 오후, 야간 하루를 삼등분하여 네 사람이 교대로 근무한다. 주 오일제라 일주일에 이틀은 휴무다. 사람의 머리로는 네 사람 삼 교대 프로그램을 짜기란 불가능하다. 엑셀이 해주었다. 오전 근무는 06시부터 15시까지, 오후는 13시부터 22시, 야간 근무는 21시 30분부터 다음날 06시 30분까지다. 난생처음 해보는 삼 교대라 내심 호기심이 났다. 삼 교대는 종합병원의 간호사, 경비 노동자, 제철소나 공장 등 환자를 돌보거나 건물을 지키거나 기계를 스물네 시간 풀가동하는 작업장에서 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 노동자의 노동 방식이다. 지금은 노동법 개정으로 열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이 교대는 사라졌지만 납기를 맞추기 위해 야근, 철야작업은 예사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달 프로그램에 따라 근무표가 나왔다. 첫날과 이튿날은 오전 근무 후 이틀 쉬고 오후 근무다. 새벽에 나와 오후에 퇴근하면 저녁까지의 시간을 유용하게 쓸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의 몸은 아침 점심과 저녁이 사계절과 같이, 또는 일생의 삶처럼 리듬이 있다. 몸의 리듬이 하루와 계절의 순환과 일치하지 못하면 무리가 따른다. 다른 시간에 근무하는 동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후에 나와 밤 열 시에 들어가거나 야간근무 후 집에 돌아가면 몸이 무거워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잔단다. 잠도 쉬이 들지 못하고 눈만 멀뚱히 뜬 채 각성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이틀 연속 휴무인 날에도 첫날은 몸이 무거워 종일 잠만 자고 다음날 좀 움직인단다. 간호원 생활을 끝내고 나서야 신체 리듬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경우도 있으니 사람의 몸은 아침에 깨어 점심을 지나며 왕성히 일하고 어두운 저녁엔 쉬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사람의 일생도 청춘의 봄과 장년의 여름, 노년의 가을과 겨울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몸의 리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문 평론가 고미숙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백세 시대를 맞는 인간의 노년은 얼마나 지루하고 고독할 것인가. 게다가 은퇴한 말년에도 밥을 벌어야 하는 노년의 삶은 고단하다.
내일 쉬고 모레부터 야간근무다.
몸이 무겁고 아침에 눈을 떠도 나른하다. 멍하니 앉았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늘었다. 새벽에 눈 뜨는 버릇은 여전해서 일어나 반바지 꿰어 입고 내성천 고수부지로 나간다. 며칠째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펫고등학교로 통하는 샛길의 벽화에 붙어 있다. 빨주노초 파랑의 단순한 조합의 색으로 다양한 일러스트 밑그림에 색을 입힌다. 미술 동아린지 미술협회 회원인지 물어보진 않았다. 더위를 피해 새벽에 나온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고 싶진 않다. 가로로 죽 늘어서 의자에 오르거나 쭈그리고 앉아 벽화에 열중한다. 편의점 봉지를 양손에 든 청년이 참 왔다며 소리친다. 붓을 던지고 사람들이 모인다. 공공 미술은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시작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한 경향이었던 팝 아트는 반예술적인 지향에 신문의 만화, 상업 디자인, 영화의 스틸(still), TV 등, 대중사회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인 주제로 택했다. 이에 더해 대중들을 위한 미술을 뜻하는 미술용어인 공공 미술은 도시의 공원에 있는 환경조각이나 벽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에 생기를 불어놓고 삭막한 일상에 서정을 입히는 벽화는 침체된 지역에 활기를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 현실의 부조리와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저 위무의 행위로 삼기엔 일상의 전망이 암울하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지방에선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주민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는 항의도 있다.
천변에는 운동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철봉대 앞에서 허리를 돌리는 노인, 마주 보고 체조를 하는 젊은 부부,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할머니. 농구대 지나 개울 아래로 내려갔다. 배수 갑문을 닮은 시멘트 다리 사이 물소리가 난다. 찔끔 내린 비는 머리카락처럼 자란 청태를 씻어내지 못했다. 구조물에 달라붙은 청태가 물귀신처럼 흔들린다. 피라미떼가 탁한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버드나무의 치렁한 가지가 수변의 풍광을 더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란 말이 떠올랐다. 풍경은 보이는 대로의 사실을 품지 않는다. 고요한 소읍의 아침 공기가 몸속으로 선득하게 끼친다. 자가 격리 오 일째. 딸은 간밤 무사히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