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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Nov 20. 2022

잡설

杂说(26)

두어 달 전부터 낮 시간에 혼자 레인을 타는 여자를 보았다. 가벼운 동작으로 레인을 타는 모습이 신기했다. 힘 하나 안들이고 크롤 영법으로 이삼 십분은 놀듯이 수영한다. 맨발로 물을 차며 통통 수면 위를 뛰어다니는 게 배추밭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처럼 팔랑이는 몸짓이었다. 처음에 옆 레인의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2km 뺑뺑이를 도는 중이었다. 벽을 짚고 돌아설 때마다 물안경을 쓰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볼 때 안 볼 때 있는 날이 연거푸 섞여 지나갔다. 시월 말 임도 풀베기가 끝나갈 무렵 오후의 수영장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초급 레인에 몇 사람이 물탕을 튀길 뿐 중상급 레인은 한가하다. 그녀 혼자 레인을 돌고 있었다. 나는 1.5km를 돌고 벽에 섰다. 그녀는 다음 영법을 하려는지 벽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스스럼 없이 받아주었다.


수영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젊었을 적 도시에서 배웠다고 했다. 난 영법이 자연스러운 게 고수 티가 난다고 했다. 그녀는 손사래 치며 오래 수영해도 힘이 안 든다며 물살 타는 걸 즐긴다고 했다. 난 동해안에서 스노클링을 오래했지만 본격적으로 수영을 한 지는 일 년밖에 안 된다고 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강습이 없어 반년 동안 남쪽에 내려가 고수들 틈에 끼어 수영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시골에 내려온 지 십 년이 되었다고 했다. 여자의 나이는 특히 수영복 차림이면 가늠하기 어렵다. 심한 경우 풀 안에서 본 사람을 밖에서 만나면 못 알아볼 정도니까. 아담한 체구에 하얀 피부는 젊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얼굴에서 나이가 드러났다. 얘기 중에 그녀는 킥판으로 아래쪽을 가리며 수줍은듯 대꾸한다. 말씨에 반듯함이 뚝뚝 묻어났다. 지금은 내외가 연금 생활을 하며 시골살이를 즐긴다고 했다.

그후로 간간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각자 레인을 타며 물탕을 튀겼다. 공연한 오해를 부르지나 않을까 자꾸 말을 걸기가 저어스러웠다. 물속에서 지나치는 그녀는 나이든 물고기처럼 부드럽고 자유로웠다. 몸은 흔들지 않고 꼬리지느러미를 살짝 튕겨  쏜살같이 미끄러지는 버들치나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나는 나비의 몸짓이 저럴까 싶을 정도였다.


두 달 지났을 무렵 뺑뺑이를 돌고 평영을 하다 킥판을 잡고 숨고르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시골생활에 만족하느냐고. 그녀는 이번에도 거리낌 없이 받아주었다. 강원도에 정착하려다 솔숲을 더듬어 내려오다 보니 이 고장이 맘에 들어 눌러앉게 되었단다. 사과 농사를 하는 남편은 전국을 다니는 일을 했다고 한다. 여행 작가? 아니란다. 암튼 읍에서 더 들어간 면에 땅을 사고 농사를 짓는단다. 그녀도 처음에는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하고 작목반에 들어가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지금은 작파하고 혼자서 지내는 게 편하단다. 군내에 있는 산이나 계곡을 혼자 걷는 게 좋단다. 난 혼자 있는 감정은 소중한 거라고 말하며 나도 주로 혼자 여행한다고 했다. 요즘 사람은 군중을 떠나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게끔 집단화되었다고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내 소개를 했다. 작가이며 연금으론 생계가 어려워 일을 다닌다고 했다. 삼교대로 일하니 수영장에 나오는 날이 일정치 않다고 했다. 그녀는 읍에서 문인들의 시화전을 보았다고 했다. 시집을 나눠주는 행사에 흥미를 보였다. 도서관을 자주 찾고 읍에 수영장이 생겨 무척 즐겁다고 했다. 나는 책 얘기를 꺼냈다. 오래 전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중이라고 했다. 삼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경험과 인식이 달라졌으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도 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난 까뮈의 페스트를 읽고 베개만큼 두꺼운 모비딕을 넘기는 중이라고 했다. 모비딕은 어릴 때 전집으로 읽었던 단순한 해양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도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를 읽고 단테의 신곡을 뒤지는 중이라고 했다. 신곡이라니! 난 머리가 아프다며 웃었다. 물속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치곤 느끼한 티가 물씬 풍겼는데, 시골 내려와서 모르는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다.


읍에서 떨어졌으니 소 키우는 집은 없다고 했다. 이곳의 개울과 들판은 농약과 퇴비로 버무려진 물이라고 했다. 시골사람도 도시사람처럼 잘살아야 하지만 지금의 방식을 바꿀 생각도 가능성도 없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게 난관에 빠진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십오 미터 레인을 두어 바퀴 돌고 그녀에게 인사하고 샤워장으로 갔다.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성은 친구가 될 수 없을까. 이성과의 관계에서 한계를 두고 규정하는 건 습속이 끼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인삼밭에서 마주친 근동의 P에게 이 년이 넘도록 말을 꺼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2년 동안 P를 세 번 만났다. 그것도 남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상대가 오해나 두려움을 품는 건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쪽에서 친구의 관계조차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상상은 주관의 산물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건 상대의 자유 의지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나친듯 가벼운 대화로 그치는 관계로 지내면 된다. 강요고 거절이고 성가신 입장은 만들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성에 대한 관능적 욕망과 호기심은 오래 전 잦아들었다. 아주 없어졌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영육의 정념(情念)에서 비롯한 복잡한 그물은 사절이다. 그런 부면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된 거다. 황진이를 젠더로 본 화담(花潭)의 경지엔 터무니 없더라도 내게 식색본성(食色本性)의 룰은 멀어졌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청춘의 열정을 되살리는 건 미숙한 삶에 다름 아니다. 나이 들면서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삼가게 되었다. 근력을 유지하기도 버거운데, 노익장을 과시하는 나이 든 청춘(?)을 보면 애처로운 기분이든다. 근육이 자신의 정체성은 아닐 텐데 말이다. 올리브가 뽀빠이를 좋아하는 건 불퉁한 팔뚝이 아니라 친절과 유머 때문이다. 청춘은 청춘의 나이 대로 열정과 실수를 경험하면 된다. 내 경우엔 지난 일에 대한 회오와 반성의 짐이 더 무겁다. 그것으로도 말년에 고통이 얹어졌는데 근육까지 키운다면 정신은 밀랍인형처럼 녹아내리고 말 거다. 수영하면서 배는 편평해졌지만 체중이 주니 주름이 는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빨리 피로에 젖고 쉬이 지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소나기가 그친 여름 밤 별빛 아래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보호하는 목동처럼 애타는 낭만이라면 족하겠다.


내가 타는 레인에 아무도 없이 혼자 물살을 가르는 게 좋다. 모비딕의 이슈메일이 야만인 퀴퀘그와 함께 허파가 찢어져라 보트를 저어 향유고래를 쫓아가는 것처럼 끈질기게 물을 헤치고 나아간다. 뒤에는 고래뼈 다리를 딛고 눈에 시뻘건 불을 켠 에이해브 선장이 하앟게 이빨을 드러낸 바다 눈알을 빠뜨릴 듯 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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