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옥남(卓玉男)②
내 증조부의 고향은 경남 하동(河東)이었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순하고 어진 섬진강의 물길이 지리산을 감돌아 남해로 들어서기 전 고단한 허리를 잠시 쉬는 곳이다. 생업은 농사였는데 자세한 전언은 없다. 다만 식솔 이끌고 구한말 시절 어수선한 무렵 경성으로 이주했다는 것밖에. 지지리 가난한 농투사니가 경성으로 이사해 자식 가르칠 깜냥은 될 것으로 미루어 일정 정도의 농토를 처분해 돈냥이나 마련했을 것으로 짐작한다면 소농은 아니었을 것 같다. 아니면 동학농민항쟁의 와중에서 관군과 왜군의 첩보를 전하는 세작(細作) 노릇으로 한밑천 거머쥐었는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탐관오리의 폭정 견디지 못해 고향 떠났는지 노름빚 시달려 야반도주했는지 상세한 내막 알 길 없다. 족보 상으론 고조부께서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나온 걸 보아 이후로 중앙 정계엔 나서지 못한 징사(徵仕)거나 몰락한 양반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할머니는 하숙집의 조밥 배식 때문에(?) 평양 정의여고(正義女高)에서 경성의 숙명여고(淑明女高)로 전학했다. 암울한 일제 강점 시절에도 신학문에의 열망으로 부푼 꿈 키워갈 무렵 여고 강당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삼일운동 이후 일제가 식민지의 강압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선회하던 때였다. 외국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현악사중주와 가곡 등으로 구성된 음악회였다. 여고 정문 오르막길 양켠에 짙은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농익은 봄날 저녁이었다. 할머니는 하숙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급우들과 전파사 앞에 모였다 .한 여학생은 가슴에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다뉴브강의 잔물결이 강당의 숨죽인 천장에 퍼져나갔다. 아무리 부딪쳐도 아프지 않을 바람의 손길이 풀냄새로 가득찬 여학생들의 가슴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음악회가 흐를수록 청중의 마음은 이국적 선율에 젖기도 하고 미래가 깜깜한 민족의 앞날에 검은 구름을 뒤덮듯 가라앉기도 했다. 할머니는 특히 하얀 얼굴에 슬픈 눈망울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움직임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는 고향집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을 닮기도 했고 때론 엄한 얼굴로 형제들을 혼내는 아버지의 느낌을 풍기며 연주했다. 작은 바이올린에 고개를 파묻고 반쯤 감은 눈으로 현을 미끄러져가는 그의 하얀 손목에선 강둑의 하얀 들꽃들이 오소소 피어났다. 눈깜짝할 사이 음악회는 끝났고 여학생들의 꽃다발 증정이 다투어 벌어졌다. 할머니는 급우에게서 하얀 얼굴의 바이올린 연주자 이름을 들었다. 김인표(金仁杓 1897~1952). 내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거쳐 모스크바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무렵이었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과에서 홍난파와 동문수학하기도 했으나 후에 홍난파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할아버지는 일본을 거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
우리의 근대음악 역사는 일제 강점시대와 해방공간을 거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를 겪어 왔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전통음악을 근대화하기 위한, 이른바 일본 국민음악 수립을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서양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을 정책적으로 실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서양음악 지향적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층인 일본유학파에 의해 우리의 교육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우리 민족성의 해체와 부정, 맹목적 서양음악의 추앙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본유학파 1세대인 홍난파(1898~1941)는 [동서음악의 비교]라는 글에서 우리 음악은 화성이 없는 미개한 음악이라고 논한 바 있으며, 홍난파와 같이 일본에서 일본용어로 정립된 일본식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서양음악 1세대(대부분 일본유학파)가 주도한 음악 교육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정책과 함께 자연스럽게 서양음악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는 서양음악은 음악인데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음악을 부정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경기도 남양 출신 본명이 영후(永厚)인 홍난파는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의 작곡자이기도 하며, 이 밖에 다양한 문예활동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의 한국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및 신동아질서 건설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지나사변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글과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이러한 홍난파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안에 포함되었다.
연애와 결혼은 순식간의 역사였다. 학업을 마치지 않고 딸에게서 날아든 기별은 횡성 고향집 부모에게는 충격 그대로였다. 게다가 친정아버지는 돈도 한푼 없는 앞날이 불투명한 풍각쟁이 한량(閑良)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불같이 성을 내며 반대했으나 끝내 둘은 친정 부모 없이 혼례를 올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종로3가의 유곽(遊廓) 건물의 귀퉁이를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녔으며 할아버지는 음악에 몰두했다 영어시험에 만점을 받아오면 할아버지는 칭찬했고 할머니는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가난한 신접살림이 문제였다. 돈벌이에 관심이 없던 할아버지의 무능력으로 할머니는 여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