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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옥남 3

by 소인

탁옥남(卓玉男)③

할머니가 낳은 10형제 중 세 째인 김해경(金海卿1929~1945)은 나의 작은 큰아버지다. 영특했던 김해경은 경기중학 시절 학병징집으로 전투비행단에 들어가 항공교육을 받는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미•일의 태평양전쟁은 점점 확전으로 치닫고 급기야 필리핀 기지의 미공군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미드웨이해전 이후 수세에 몰린 일군은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 카미카제(神風)특공대를 만들어 젊은 비행사들을 인간 폭탄으로 밀어부친다. 수차례 출격했던 김해경은 마지막 비행에서 미해군의 대공포의 공격을 받고 현해탄 상공에서 격추된다. 식민지 조선인으로 원치 않은 남의 전쟁에 뛰어들어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는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으로서 큰아버지의 참전과 뒤이은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큰아버지 김해경은 자랑스런 황군으로서 침략국인 일본에 대해 충성을 한 것일까. 아니면 시대 상황에 떠밀려 징집되어 조국 독립의 한을 품고 이승 저편으로 건너간 것일까. 당시 일본군 항공대는 자원입대였는데 그렇다면 김해경은 스스로 황군의 충복을 자처하고 나선 것일까. 주변 상황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나 기록이 없으니 저간의 속내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당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던 아이들은 집안의 분위기에 따라 항일이나 출세의 가치관을 키웠으리라 생각한다. 제도교육은 철저히 황국 신민화 교육이었으니 자생적으로 독립의 꿈을 키우긴 어려우리라. 큰아버지 또한 황군으로서 나라(일본)를 위해 봉사하고자 자원했을 것이다. 그당시 하늘을 나는 파일럿은 소년들의 로망이기도 했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친일파'에 대한 정의와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처리 과정을 일별한다.

'친일파’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하였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에 있는 지인과 가까이 지낸다거나 일본인들과 사업차 거래하는 사람들까지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에 편승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고통을 가한 무리들을 이른다.

해방후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행한 사람들을 청산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법률을 만든 적이 있다. 처음은 미군정기인 1947년 7월에 과도입법의원에서 상정한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이었으나 군정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정부수립 후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거의 1년간 시행하였으나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고 그 세력을 비호한 이승만 정권의 훼방(毁謗)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한 자를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첫째, 일본정부와 통모(通謀)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하였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는 자. 둘째,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 셋째, 일본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ㆍ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 넷째,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부의원(府議院)의 고문 또는 참의, 칙임관 이상의 관리, 일정행위, 독립 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간부된 자,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자, 군수공업을 경영한자, 도ㆍ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된 자 중에서 일제에 아부하여 죄적이 현저한 자, 관공리가 되었던 자로서 악질적인 죄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자, 종교ㆍ사회ㆍ문화ㆍ경제 기타 각 분야에서 악질적인 언론저작과 지도를 한 자, 일제에 대한 악질적인 아부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등으로 규정하였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1년 남짓, 이 법에 의해 처리한 친일파는 극소수였다. 총취급건수 682건에 검찰부의 기소가 221건, 재판부의 판결이 40건(체형 14건, 공민권 정지 18건, 형면제 2건, 무죄 6건)이었으나 한사람도 사형대에 올려놓지 못했고, 그나마도 그 이듬해 6ㆍ25가 일어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일제 치하 36년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소수의 처벌은, 불과 4년밖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유럽의 몇몇 나라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들 나라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철저하게 나치협력자를 처벌하여 추상같은 심판을 내렸다. 프랑스의 경우, 사형선고된 자가 6,700여명인데, 그 중 760여명이 사형집행되었고, 2,700여명이 종신강제 노동형에, 10,600여명이 유기강제 노동형에, 2천여명이 금고형에, 2만 2천여명이 유기징역에 처해졌고, 벨기에는 5만 5천건, 네덜란드는 5만건 이상의 징역형이 주어졌던 것이다. 반민법을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한국민의 의지는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불가항력이라고는 하지만 일군으로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바쳐야 했을까. 징병1기로 대전의 일본224부대에서 전차 폭파의 카미카제 훈련을 받았던 유수영 씨의 증언이다.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 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내와 국외에서 풍찬노숙하다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의 주검. 내가 거리에서 만나는 먼지와 바람, 산과 들에서 움켜쥔 흙덩이는 그들이 남기고간 살과 피가 아닐까. 풍화된 꿈과 한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바람결로 스치는 그들의 속삭임을 우리는 듣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일본 침략자 편에서 자원입대하여 목숨을 기꺼이 던진 청춘들의 꿈과 열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미당(未堂)의 말처럼 '조선의 독립이 이처럼 빨리 올 줄' 몰랐단 말인가. 비극적인 시대는 젊은이의 기개를 이렇게 나타내기도 하는 것 같아 분노와 허망함이 마구 비벼지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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