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수능평가를 한다.
대학을 가기 위한 열망은 수험생과 가족에겐 치러야 하는 고역스런 통과의례다. 인문계 고등학교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도 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이 땅에서 생계와 사회적 지위를 위한 일차 관문이다. 수능시험 날이면 각 고사장에는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줄을 선다. 자식의 시험 성공을 위한 기도다. 더 좋은 대학을 소원하는 건 사회 진출과 입신 성공을 향한 선점의 우열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함. 이미 전국의 사찰에선 입시 성공의 백일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팔공산 갓바위 등 효험 뛰어난 전국의 명당에서 자식을 위해 소원을 비는 부모의 마음은 맹렬하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머리 싸매는 수험생보다 입시조차 치르지 못하는 수많은 청년들을 떠올린다. 고교를 마치자마자 자신의 생계를, 경우에 따라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청춘들은 알바 자리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눈에 불을 켠다. 입시 지옥, 대학의 낭만, 학업의 정진... 이런 건 아득한 남의 일이다. 출발선에서부터 고르지 못한 기회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넉넉한 부모 아래서 자란 청년들에게 기회의 폭은 넓다. 설령 인생의 고비에서 한두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동력은 남는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자식은 좌절을 밥먹 듯 경험한다. 경험이 삶의 밑천이라지만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출생에서부터 본인의 의지가 아닌 차별을 타고난다.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 사회 조건에 따라 앞길이 운명처럼 보인다. 사회 구조가 촘촘한 차별의 그물로 짜여 있고 보이지 않는 계층 간 서열은 이후의 행로를 좌우한다. 거기엔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의 질서가 작용한다.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배반하는 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는 상실된다. 단단한 토대와 배경으로 상위 1%를 선점하는 건 개인의 능력 이전에 부모의 능력과 배경을 담보로 한다.
서열과 차별이 고착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서열과 차별 의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역지사지는 남의 입장에서 바라본 '나'이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기엔 처음부터 너무 경쟁적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신자유의 경쟁에서 이기는 성공적인 삶이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한 교육이 아니다. 성공을 위한 일념으로 사회에 포진한 구성원은 만족을 모르고 질주한다. 내편 네 편을 가르고 비슷한 사람끼리 집단을 형성한다. 사용자가 되면 사용자 연합으로 노동자를 깨는 데 골몰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신화는 1%보다 못한 우연의 확률 게임일 뿐. 속악한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나와, 우리와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헐뜯고 가짜 뉴스를 동원해 깎아내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건설회사 노조 집행부의 홍보부장을 했다. 박통을 암살한 김재규를 제거하고 빛고을 광주의 희생을 토대로 정권을 거머쥔 어이없는 군벌 깡패 전두환이 끝물의 철권을 휘두르던 무렵이었다. 노동 교육 가는 길에 짜장면 먹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팔십 년 오월. 광주의 소식을 직업훈련소에서 들었다. 불과 며칠 전 친구들과 종로통에서 최루탄에 쫓겼다. 최전방 스크럼이 무너지고 아차 하는 사이 전경의 곤봉에 뒤통수를 맞았다. 주먹 만하게 부어오른 혹을 만지며 한강 다리를 건너 서초동까지 걸어서 친척 집으로 갔다. 인천 짠물 바닷가에 중공업 부설로 생긴 직업훈련소 미장과에서 매일같이 몰탈을 바르고 바수는 동작을 반복했다. 어느 인사가 개발했다는 몰탈은 보기엔 시멘트와 영락없었는데 굳어도 부수면 으깨어져 다시 미장 실습으로 쓸 수 있었다. 삼 개월의 실습 기간 중 이 개월은 교육이었고 나머진 현장 실습으로 팔려나가 취업으로 이어지곤 했다. 취업이라야 말 그대로 노가다 패거리에 어울려 객지를 떠돌며 밥 버는 거였다. 훈련생의 면면은 천차만별이었다. 나이와 출신지 학력도 제각각이어서 학교 문턱도 밟지 못한 무학의 농사꾼부터 대학 나온 실업자, 육군 장교 출신 등 다양한 군상들이 모였다. 그들의 목표 중 하나는 중동 건설현장에 잡부로 뽑히는 거였다. 훈련소 수료 전에 해외근로자 심사가 있는데 거기 차출되어 쓰러진 가세를 일으켜 세울 한 밑천 잡는 게 주된 관심사요 숙원이었다. 훈련생들은 훈련소 근처의 하숙집 골목에 흩어져 살았는데 저녁이면 끼리끼리 모여 조개를 삶아 막걸리 추렴을 했다. 하숙집 방이나 담벼락엔 징용 간 규슈 탄광에서나 볼 법한 낙서가 빼곡했다.
일요일엔 키가 유난히 작은 미장과 선생과 어울려 낚시를 갔고, 인천에 사는 동기생 형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 고향이 전라도인 꺽다리 형이 풀 죽은 음성으로 광주 얘기를 꺼냈다. 모두들 침을 삼키며 말을 아꼈는데 함부로 시국 얘기를 꺼낼 수 없는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들리는 풍문에 의해 광주의 실상이 입에 담기에도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꺽다리 형은 내려가 봐야 한다면서 중얼대며 눈물을 찍었다. '씨발, 엎어치나 메치나 우리 같은 흑싸리 껍데기들 사는 건 마찬가지야' 누군가 한숨 섞어 거칠게 쏘아붙였다.
이 개월의 실습 교육이 끝나고 삼 개월째엔 현장으로 팔려나갔다. 흩어진 동기생의 소식은 간간이 들리다 끊어지고 말았다. 인천에 살던 기만 형과도 소식을 주고받다 그는 중동으로 떠났고 난 대학에 들어가면서 영 이별이 되었다. 사람 좋은 인상에 허탈한 목소리의 기만 형이 그립다. 난 해외 취업에서 탈락하고 현장을 따라다니다 일찌감치 접고 수락산 별장으로 들어갔다. 상계동 수락산엔 망한 사촌의 별장이 명목으로 남아 있었다. 아궁이에 불 들이고 초가을 산에서 독버섯을 따먹으며 된장 하나와 라면으로 일 년을 버텼다. 간간이 노가다로 날품을 팔았다. 한 번은 아랫마을 청년들이 찾아왔는데 교회 청년회였다. 청년들의 소개로 목사를 만났는데 나중에 알았는데 반체제 운동을 하던 문대골 목사였다. 문 목사는 내게 몇 마디를 던지며 의중을 떠보는 것이었는데 아마 수상한 흔적을 갈파하려는 눈치인 듯했다. 별일 없이 지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때 만났던 청년과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운동권 청년이었다. 편지 내용은 어슴푸레하지만 나를 격려했던 듯하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정진동 목사를 찾아갔었다. 야학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그도 수배 중인지 낡은 집은 불 꺼진 채 어두웠고 시대 역시 깊은 암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태풍이 밀어 올린 비구름인가.
연해 사흘 쏟아지던 빗발 머춤한 틈에 도서관에 갔다. 눅진한 기운을 잠뽁 머금은 소읍 공기는 서늘한 편이었다. 이른 추석이라 그런지 구월 접어들면서 기온은 빠르게 내려갔고 연사흘 내린 빗발에 끝물 더위마저 쫓겨간 느낌이다. 책을 반납하고 대출했다. 도서관 골목길을 빠져나와 고수부지 옆길로 들어섰다. 은어축제 끝난 게 어제 같은데 추석 지나고 송이축제가 열리는 내성천변은 숨 돌리듯 한산하다. 비 내리는 평일 누구라서 산책 나올까 싶긴 하지만 소읍의 인구는 장날 빼놓곤 흩어지면 성긴 그물 같다. 범들 초입에서 안동 길로 돌아 언덕을 올라갔다. 상운면으로 슬슬 바람이나 쐬다 들어갈 생각이다.
쇠락한 고장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인구가 준다. 골골이 들어차 비알밭 일구며 연명하던 사람들은 산업화와 함께 도시로 몰려갔다. 새마을운동은 지붕을 갈고 길을 넓혔지만 도시로의 이탈을 재촉했다. 기계화 영농이 자리 잡은 만큼 농약과 비료 없이는 지을 수 없는 약탈 농법은 농촌의 생태계 전반을 무너뜨렸다. 농약에 버무려진 땅, 냄새나는 개울물, 만장처럼 펄럭이는 검은 비닐의 풍경. 벌레고 가재고 살 수 없는 물은 철새와 짐승도 줄어든다. 자연은 먹고 먹히는 싸움터가 아니라 공생의 터전인데 아래가 무너지면 위도 무사할 수 없다.
칠십 년대 풍의 중국집에서 시골 짜장면을 먹었다. 별로 위생적이지 않은 놈이 수저통에서 젓가락 꺼내기도 저어스러울 정도로 푹푹 먼지에 잠긴 오래된 짜장면집. 건너편 문 닫은 양조장엔 간판만 걸렸다. 안동 가는 길목의 면소재지는 목숨이 간당하게 붙은 마을 같다. 한계(限界) 마을은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50% 이상인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인들 떠나면 하나둘 없어지는 마을 생기고 농사지을 사람 없는 묵정밭은 들풀 우거진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살던 빌뱅이 언덕도 풀이 우묵장성일 거다. 그가 노래했던 풀꽃과 나무들, 별빛은 지금도 여전할까. 스산함은 시대의 공통된 정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