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泥棒

by 소인

泥棒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은 어떤 걸까.
삶이 삶다운 삶이기 위해선 공정한 사회를 토대로 하지만 사람 숫자만큼 삶의 모습도 다양하다. 행복의 기준도 삶의 가치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지속 가능한 삶'에서 '지속'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말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무한 탐욕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건 강한 자이고, 소수자와 약자의 처지를 국가가 보호한다 해도 현재의 세금제도 아래서는 나라 곳간이 화수분이 아닌 다음에야 지속에 대한 확신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의식주에서 특히 주거의 경우 그것이 삶의 목적이나 고통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주거 빈곤층은 주거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절약하며 내핍하는 생활을 하거나 비싼 난방료를 쓰면서 비가 오면 줄줄 새는 집에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쾌적한 주거가 보장된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가능성이 없는 입장이라면 불편함은 참이야 하는 고통이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갈수록 치솟는 집값은 서민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점점 아득한 내일로 밀어버린다.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라면 발 뻗고 잔다. 주거 빈곤층은 치솟는 월세, 전세가에 불안한 현실을 산다.

삶은 모든 부면에서 충족을 필요로 하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지인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어쩌다 지속가능위원회의 장을 맡게 되었다고. 관과 민이 손잡고 지역의 문제들을 협의하여 해결해 나가는 단체란다. 난 대뜸 강 상류의 아연제련소 폐기를 말했다.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한다면 선거 때마다 주요 이슈로 꺼내는 골칫덩어리 제련소를 해결하는 게 우선 아니냐고 물었다. 주변 산의 나무가 죄다 죽고 강고기가 살지 못하는 이타이이타이병(痛い痛い病)을 일으키는 카드뮴 중독 피해는 조사에서 나타난 것만도 엄청나다. 오염된 지하수와 강물, 숲이 죽어나간다. 업체는 지역주민의 생계와 지자체에 바치는 세금을 볼모로 소송을 걸며 버틴다. 지속 가능한 삶이라면 미래의 후대를 위해서 환경파괴 업체는 사라져야 옳다. 그는 그건 우리 소관 문제가 아니라고 못 박듯이 말한다. 소관이 아니라니. 삶의 행복에 대한 조건이라면 삶의 전 부문에 걸친 모든 게 사안 아닌가.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된다는 기준이 있다는 말인가. 그게 말인가 똥구녕인가. 실소와 함께 평소 생각한 소회를 덧붙였다. 쾌적한 삶의 조건을 위해 시골 여기저기에 공원을 지어 주민의 휴식과 건강을 도모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또한 수백 억을 들여 휴양림을 짓거나 정자 문화관을 지어 전통을 계승하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업비의 조금을 떼내 지금 건설 중인 서민 임대주거인 행복주택의 수를 늘린다면 좋지 않겠나. 생색내듯 군청 앞에 신혼부부도 입주를 꺼리는 비좁은 평수의 임대주택 몇 채 짓는다고 박수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 가정과 독거노인, 장애인 가구 등 지역사회에는 돌봄이 필요한 대상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심각한 문제다. 복지나 돌봄만으로는 그들의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관광, 문화사업의 일부를 주거 빈곤층의 문제에 쏟는다면 좋지 않겠냐고 운을 뗐다. 그는 주의 깊게 듣지 않는 눈치였다. 완장에 더 구미가 당기는 눈치다.

자본주의 제도 아래의 민주국가는 사유재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일테면 수십 년 동안 마을 주민이 오가던 길이 개인 땅이라면 하루아침에 막아도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거다. 땅 주인의 허락 없이는 도로포장도 사용도 불가능한 게 현행 민법의 실정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민과 관계 공무원의 의지다. 아예 협의의 여지없이 딱 잘라 불가능을 말하는 공무원은 나라의 녹을 먹고살 자격이 없다. 주민의 민원을 원론적 입장에서 끊는다면 세상에 처리될 민원은 가물에 콩 나기일 거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다각도의 설득과 타협으로 주민의 생활에 편리한 방향으로 타협점을 찾는 게 순서일 것이다. 수십 년을 주민들이 사용한 길을 내 땅이라고 팔지도 않고 포장도 못하게 해 요즘 같은 시대에 물웅덩이가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매일 덜컹대며 지나간다. 트럭에 흙을 싣고 밭에 객토라도 할라치면 길 무너진다고 못 지나게 하는 땅 주인의 심사는 고약하다 못해 반생명적이고 반공 동체적이다. 군청에서 땅을 매입하여 포장을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들어주는 쪽이었다. 얼마 후 불가하다는 통보다. 주민의 말에 따르면 시내 사는 아들이 부동산 업자인데 땅을 팔지 말라고 부추겼다는 거다. 땅값을 몇 배나 받을 속셈인가. 돈 욕심으로 이웃의 불편을 눈 감는단 말인가. 민주사회의 사유재산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좆도 뭣도 아니 잖은가. 차라리 길을 막아라, 그러면 반대쪽으로 길을 내면 될 것 아니냔 주민이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으로 세상이 뒤바뀌었을 때 반대쪽에 부역했던 사람은 죽창에 찔리거나 총살당했다. 시절 변했다고 내 땅임네 어거지 쓰는 심보에다 쇠말뚝을 박아주고 싶다. 천년만년 땅 파먹으며 살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무슨 명 판결이라도 되는 양 손사래 치는 공무원도 낯짝이 개껍데기되도록 무두질당해 싸다. 주어진 일에 몸을 사리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을 목에 걸고 조리돌림 맛 좀 봐야 할 거다. 집을 몇 채씩 갖고 의원 배지 단 놈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비싼 임대료로 서민의 등골 빨아먹으면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그 마을에는 공무원이 여섯 명이나 나왔다고 자랑처럼 떠들 정도다. 철밥통인 공무원은 시골에서도 유세다. 가문의 영광이다. 이장은 뭣하는 사람이며 선거 때면 표를 얻으러 굽실대는 군의원은 뭣하는 소뼈다귄가. 농사 차량만 다니는 길에도 콘크리트 포장하고 안동네로 가는 길은 얼마 전 미끈한 아스팔트로 닦아놓았는데 그쪽 길은 여전히 凹凸로 울퉁불퉁한 곰보딱지 흙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진 자의 법이고 기득권자의 지속 가능한 미래다. 가난하고 낮게 사는 자들은 이 땅에서 우울한 전망을 주홍글씨처럼 걸치고 산다. 삶에 희망이 없을 때 목숨을 버린다. 더 살아 봐야 고통인 삶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은 사람들을 절벽으로 내몬다. 저출산 정책이라며 가임여성 분포를 지도로 그리는 정책입안자가 있는 마당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국민을 새끼 낳는 암퇘지 정도로 보는 자들에게 인권이고 여성주의는 개발에 편자 꼴이다. 결과만 따지는 생산과 효율의 사고에서 과정과 맥락은 생략된다. 고통뿐인 절망이다. 그래서 죽음의 외주화로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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