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초기 동양척식회사의 농간과 수탈로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은 종내엔 높은 도지와 일본에서 건너온 일인 농민에 의해 그나마 소작도 떼였다. 살길은 일본으로 실어내는 쌀을 지는 부두 노동자로, 광산과 도로 공사장 인부로 나서야 했다. 구한말부터 살 곳을 찾아 만주로 하와이로 가난한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들이 연명하기 위해 먹은 건 쌀에서 보리밥으로, 조밥에서 풀떼기 죽으로 내려갔다.
보리가 나기 전 겨울을 살아낸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쑥과 나물을 캐고 송기를 벗겨 먹었다. 소증(素症)으로 부황 난 배는 맹꽁이 마냥 부풀고 버짐 핀 얼굴은 누렇게 떴다. 이질과 호열자(콜레라)가 휩쓸면 한 집 건너 죽어나갔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돌림병으로 죽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 찢어지게 가난한 중에도 똑똑한 자식을 둔 집의 희망은 자식의 출세를 통한 도약이었다. 작게는 선생질과 공무원질로 나서는 것이고 크게는 사법고시를 패스해 판검사가 되는 길이었다. 학구열은 그대로 출세 열이었다. 자갈논을 팔아서라도, 식구 같은 농우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은 가르쳐야 했고, 대학마다 팔아먹은 소뼈가 쌓여 우골탑을 이뤘다.
식민 시절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에게 각인된 반공주의와 출세주의는 처세술로 자리 잡았다. 통일과 민주를 함부로 들먹일 수 없는 분단 상황에서 민족의 미래보다 가족의 앞날이 먼저였다. 생활의 구석구석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입에 풀칠이란 목전의 갈급한 화두였다. 꽁보리밥에 풋고추 된장 찍으면 별미였던 밥상도 시절에 따라 흰쌀밥에 반찬 가짓수가 늘어났다. 못 먹어서 병들고 배배 꼬이던 세월이 너무 먹어서 탈 나고 부어 터졌다. 시간과 돈을 들여 살 빼는 사람이 늘었다. 넘쳐나는 옆에는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굶는 노인은 복지회관이나 돌보미에서 가져다준 도시락을 먹는다. 스무 살 어름 저녁이면 잠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잘 곳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꿈을 가끔 꾼다.
옆자리의 중년 여자 둘은 말없이 고기와 야채를 입에 넣고 우물댔다. 맞은편의 젊은 남자도 말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신 그는 고기는 씹지 않고 부지런히 불판의 고기를 뒤집었다. 지방에 한우센터가 생긴 이후 주말이면 근동에서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불경기라고 울상이면서도 먹긴 먹어야 했다. 중년 여자들의 입성으로 보아 농사짓는 사람 같다. 지글지글 연기를 피우며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마치 고기를 먹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것처럼 옆자리의 사람들은 경건한 분위기로 먹는 데에 열중했다. 자꾸 쳐다보다 보니 슬픈 생각이 들었다. 사르르 입에서 녹는 소고기의 기막힌 맛을 처음 안 사람처럼 꾸역꾸역 침묵을 대화 삼아 먹는 사람의 불룩한 볼과 멍한 표정이 우습고 슬퍼 보였다. 두 여자의 시선은 불판의 고기와 야채 그릇을 번갈아 오가는 젓가락 끝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그들은 고깃집으로 오기 전 할 말을 다 마친 것 같았다. 오직 굽고 먹기 위한 동작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마치 시간을 재고 그 안에 식사를 끝내야 하는 시합을 하는 사람들처럼. 일행이 시킨 갈비탕은 빠르게 나왔다. 작은 뚝배기 속에 고기가 푸짐하게 들었다. 국물도 진했다. 잔을 하나만 달래서 술병을 땄다. 양조장 사장이 첫 잔을 따르겠다고 술병을 들었다. 짜르르 빈속을 알코올이 쓸고 내려갔다. 젓가락으로 국물을 저어 고기 한 점을 꺼냈다. 부드런 소고기가 고소하게 입안에서 씹힌다. 술도 소주보다 양주가 빨리 취하고 뒤끝 없이 개운한 것처럼 고기도 소고기가 맛은 좋다. 돼지고기처럼 자주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니 더 구미가 당기는 게 사람 입맛인가 보다.
양조장 술 빼는 작업이 늦어져 점심시간이 넘어서 끝났다. 술을 되돌려 넘기는 잠수펌프가 고장 난 거였다. 사장은 펌프를 들고 수리점에 다녀오며 미안해했다. 남은 두 사람은 수동으로 천천히 막걸리 세 말을 병에 담는 동안 사장은 애가 탄 모양이었다. 사장 부인이 읍내 중국집에 전화했다. 멀어서 배달 불가란다.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는 걸 부득불 가까운 데서 갈비탕이나 먹자고 해서 따라온 거였다. 막걸리가 묻은 바지가 마르니 허옇게 자국이 드러났다. 줄곧 내린 비에다 땀에 젖은 작업복은 눅눅해졌다.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식색본성(食色本性)이다.
부처도 예수도 거지도 미녀도 굶고는 못 산다. 생명 활동인 취식은 섭세의 행위 중에서도 으뜸이다. 삼시 세끼 먹고 하나뿐인 목숨 대통령이나 서민이나 똑같다고 하지만 문제는 삶의 질이다. 거친 밥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건 견자(見者)의 성찰이겠지만 무지한 부자는 뜨신 밥에 명란젓을 올리면서도 만 가지 걱정으로 속이 탄다. 고기가 흔한 세상, 먹을 것이 차고 넘쳐서 먹방이 유행하는 건 아니다. 의미 없이 흔들리는 삶 마음 둘 데 없으니 싼 웃음의 코미디에 손뼉 치고 폭풍 흡입의 먹방에 몰입하는 거다. 노력하면 저마다 근사치의 목표를 이루었던 전 시대에 비해 지금은 외피는 풍요해 보일지 몰라도 속내에선 시베리아 설한풍이 몰아친다. 빈부의 양극, 기회의 불균형, 무한 경쟁과 비교하는 삶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1%의 유한계층이다. 자투리 파이를 나눠 먹는 다수의 생존은 눈물겹고 고단하다. 공짜로 얻는 건 물과 공기, 길과 숲이었는데 그나마도 공용(公用)의 정의는 사라지고 대가가 따르는 경제 개념이 뿌리내렸다. 대가의 보상은 고사하고 미세먼지와 오염된 물, 사라지는 숲으로 생태가 무너지는 중이다. 대량소비에 대량생산이 따라가니 집단 사육의 병폐는 고스란히 소비 대중의 몫이다.
학자는 북한 지역의 돼지가 전멸되었다고 한다. 이대로의 방제시스템이라면 남쪽의 돼지도 사라질 판이라고 한다. 가축이 살 수 없는 땅이라면 인간도 살 수 없다. 먹고 먹히는, 기르고 키우는 방식은 동식물이라고 별다른 게 아니다. 생산과 효율, 발전과 개발이 인간을 점점 막다른 길로 몰아간다. 사통팔달로 뻥뻥 뚫린 길, 5G 빛의 소통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나. 길이 아니면 돌아서야 한다. 눈을 감은 채 생각 없이 달리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