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링 ①
새벽길은 내밀한 느낌이 있다. 밤새도록 여자와 그 짓 하고 온몸의 기란 기는 다 빠져 가죽만 남은 사내 기신거리며 해장 집 기웃거리며 흐느적댄다. 여자는 흐르는 침 마시며 널브러져 있다. 목덜미 흐르다 멈춘 침 자국. 남녀의 교접이란 전투와 같아서 맞닥뜨린 아군과 적군의 척후병끼리 한바탕 벌이는 육박전이다. 피아를 분간할 수 없는 칠흑 속에서 상대와의 거리 가늠하여 주먹을 날린다. 옆 통에 일격을 당한 상대 비틀거리며 중심 잡는 사이 달려가 냅다 발차기를 날린다. 상대 또한 단련된 병사. 이쪽의 발길질을 손으로 잡고 간단히 비틀어버린다. 아뿔싸, 발 날린 쪽과 그 발을 잡은 두 사람 한데 엉켜 나뒹군다. 이제 육박전은 개싸움으로 진화한다. 거친 숨소리와 살의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치명타를 날리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여자는 남자의 배 위에서 온몸을 비꼰다. 사내의 엉덩이 짓에 물결 타던 여자가 자지러지며 허리를 새우처럼 말기 시작한다. 고지의 반은 이미 넘어섰다. 숨 턱에 찬 여자 애원하듯 떨며 나직하게 속삭인다. 조금만 더요... 욕망을 탐하는 여자의 등골 흥건하게 젖었다. 사내의 다리에 쥐가 난다. 승패의 여부는 상관없다. 상대와 함께 거꾸러지든 상대가 날 제압하고 일어서든 최후의 일합을 날려보기로 한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사내도 참고 참았던 방아쇠를 당긴다. 욕망이 무너진 거친 입김이 한동안 어둠 속에 고인다. 사내는 피 통하지 않는 다리를 주무른다. 욕망은 완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가지를 칠 뿐이다.
베어링 ②
베어링은 회전하고 있는 기계의 축(軸)을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키고 축의 자중과 축에 걸리는 하중을 지지하면서 축을 회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계요소다. 살아있는 생물은 움직임이 있는 관절에 유막과 함께 수없이 많은 근육들이 있다. 기계는 움직임이 있는 곳엔 관절 유막 대신 베어링이 들어간다. 회전이나 운동 등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부품이다. 종류도 다양하여 셀 수 없다.
베어링이 없다면 마찰로 발생되는 변형을 막을 수 없다. 굳이 막는다 해도 교체 비용이 엄청날 거다. 인체로 얘기하면 다리 관절만 바꾸면 되는데 다리를 통째로 바꾸는 거와 같다.
베어링은 관계를 연결하는 언어와 같다. 그러나 말은 관계를 효용적으로 연결할 때만 말이 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말은 쉽지만 어렵다. 자신은 포용과 배려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은 강요와 폭력적이라면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이 말 같지 않은 경우다. 너와 나, 우리는 말로 관계에 흠집을 내고 상처를 주며 급기야 덧나고 터져 관계가 깨지거나 관계 청산을 겪는다.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가치가 반드시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닐진대 관계 청산이나 관계 회복도 반드시 나쁘거나 바람직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자신의 가치와 거꾸로 가는 관계라면 회복은 요원한 일이다. 살 날보다 갈 날이 가까운 지금 우물쭈물할 틈이 없다. 버나드 쇼우의 묘비명을 기억하라.
베어링 ③
새벽 다섯 시에 집 나선다. 길 막히지 않고 호젓해서 좋다. 오전 여섯 시 첫 쓰레기 수거작업이다. C동 중간 정자 항아리서 담배꽁초 주워 담는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공장 내 외곽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에 도착하면 날이 훤하다. 나룻배 같은 철판 리어카 밀고 화물 상하차 컨베이어가 있는 출입문 들어가면 품질관리실이 첫 방문지다. 휴지통에 밴드가 사라졌다. 새로 구해 끼워야 편하다. 여자 넷과 키 작은 사내가 일하는 곳이다 대부분 아가씨다. 라인을 가로질러 출입문 바깥의 항아리와 군데군데 놓인 휴지통에서 밤 사이 나온 쓰레기를 수거한다. 적은 양은 집게로 꺼내거나 봉지 전체를 들어내기도 한다. 종이박스가 쌓이기도 기름걸레가 나오기도 한다. 기름 먹은 걸레는 중량감이 엄청나다. 여기 와서 기름도 공중에 부유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부유하는 건 공장의 불빛을 보고 달려온 나방이나 밤도와 기계 돌리는 노동자들의 핼쑥한 삶 또한 늘 떠다닌다. 기계가 터져 유압유가 바닥에 쏟아질 땐 청소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음료자판기 지나면 치구 제작실이 나온다. 일종의 금형 제작이다.
칠천여 평의 공장 안을 안팎으로 한 바퀴 도는 동선이다. 치구 제작실 나와 임원실 앞의 열처리반 입구가 두 번째 정자의 중간 지점이다. 화단이나 배수구 주변의 담배꽁초를 집중 탐색하며 지나간다. 열처리반 세 곳의 쓰레기통을 비우면 선철반 가기 전 마지막 식당 앞 정자를 돈다. 개망초꽃이 소담스레 피었다. 진흙물이 부연 연못의 비단잉어는 아직 기상 전이다. 새벽에 나선 구내식당 아줌마들의 흰 가운이 언뜻 비친다. 선철반 세 곳의 쓰레기를 수거하면 한 바퀴 다 돈다. 복더위라 아침부터 육수가 줄줄 흐른다. 여름 지나면 살 좀 빠지겠다. 이웃집 여자가 못 알아볼지도 모르겠다. 민머리 보면 알아채겠지. 박노해 이후로도 노동의 새벽은 멀다.
베어링 ④
쓰레기 수거는 오전 여섯 시, 열한 시 그리고 퇴근 전 오후 네 시 세 차례다. 한 번 도는데 쓰레기 양에 따라 사십 분이나 한 시간을 넘기도 한다. 아침에는 밤 사이의 흔적이 남는다. 담배꽁초와 컵라면 용기가 자박한 물기 담겨 쌓였다. 졸음의 양만큼 쓰레기도 쌓인다. 아침 쓰레기 수거 후 청소차 타고 바닥을 닦는다. power boss란 상표가 붙은 전기식 청소차는 물을 뿌리며 닦는 패드와 물과 오물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가 달려 있다. 물을 채우고 돌리는 배터리 용량은 대략 두 시간이다. 일곱 시 반에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삼십 분 쉰다. 돌아와 중앙 통로를 비롯한 통로와 출입구 공장 바닥 열처리반 바닥을 닦는다. 새벽잠을 반납한 탓에 청소차에 앉으면 졸음이 밀려온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전동지게차와의 충돌을 조심해야 한다. 지게차가 우선이다. 지게차는 품질검사를 통과한 베어링 박스를 이리저리 옮겨 배치한다. 청소차의 조작은 간단하다. 전원 열쇠를 돌리고 전진 후진의 버튼이 있다. 물의 양을 조절하는 레버와 작업 종류를 구분해놓은 레버가 있다. 삼륜차라 같은 자리서 맴돌 수도 있다. 클랙슨 단추도 있는데 공장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가을 매미 소리다.
점심시간 이후엔 주로 각 동에 배치된 미화부 사람들의 공동작업이 있다. 매일 하는 건 아니고 계절에 따라 잔디 깎기, 잡초 뽑기, 공동 구역 청소 등 총무과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처리한다. 청소차 돌리는 외에 봉지와 집게를 들고 공장 외곽을 돌며 잡초를 뽑거나 함부로 버린 꽁초를 줍는다. 나도 예전엔 꽁초를 함부로 버렸다. 입으로 빨던 것이었는데. 꽁초는 벤치 밑이나 배수구, 빗물 홈통 주변의 후미진 곳에 숨는다. 수요일은 보일러실 청소와 금요일엔 공동작업으로 정문 밖 주차장 꽁초 줍는 날이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한 번도 못해봤다. 성적순으로 간택되면 직업군인이던 아버지 따라 방학 중에 전학 갔기 때문이다. 그 탓에 미화반장은 더러 했다. 교실 뒷벽에 그림과 글짓기를 써서 붙였다. 보기에 좋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창세기 때 하나님이 그랬다. 그 뒤로 세상은 망가졌다.
베어링 ⑤
각 동마다 남자 한 명, 여자 두 명이 배치되어 구역을 맡아 청소한다. 아주머니 한 사람은 사무실 청소를, 한 분은 화장실과 공장 기계 사이 바닥을 청소한다. 아주머니들은 청소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데 한 사람은 소형 청소차도 사용한다. 아주머니들은 캐리어에 세제, 마포 걸레, 비, 쓰레받기 등을 싣고 다니는데 마주치면 커피를 타 주거나 사탕 과일 등 먹을 것을 준다. 커피는 에어컨이 빵빵한 탈의실에서 마시며 한숨 돌리기도 한다. 삼인 일조는 서로 도와가며 맡은 구역의 청결을 담당한다. A라인 쪽에는 사무실과 화장실이 있으며 이층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넓은 휴게실과 탈의실, 사물함, 샤워장이 있다 점심 후에는 에어컨 아래 다디단 쪽잠을 청하기도 한다. 수거한 쓰레기는 분리수거장에 버리는데 고철, 비닐류, 폐지, 기름통, 폐기물 등으로 분리해서 버린다. 청소차도 이곳에 와서 오수를 버리고 세척한다. 청소 사무실은 D-15라인에 있는데 특별한 용무 아니면 매일 아침 들릴 필요는 없다. 자기가 맡은 공장 구역이 일터다. 사무실 창고엔 장갑 비닐봉지 등 청소용품이 구비되어 있다. 미화반 사람들은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아니면 종일 가도 만나보기 쉽지 않지만 출퇴근할 때 카풀하기 때문에 주차장 입구에서 인사를 나눈다. 가끔 청소차를 닦거나 쓰레기 버릴 때 마주치기도 한다. 서로 힘든 일하는 동료 의식이 스민 표정들이다.
밥 먹는 시간은 밥상머리에서 위대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시간이다. 새벽 근무조와 철야 근무조가 일곱 시 반에 조식을 먹는다. 중식은 열두 시 석식은 다섯 시다. 칠백 명의 노동자가 밥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드나드는 풍경은 왁자글한 생명이 넘치는 공간이다. 밥을 벌기 위해 나선 사람들 밥에게 경배하듯 머리 조아리고 국에 술을 적신다. 밥하는 노동자를 폄하한 여성 국회의원은 요즘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내로라하는 기득권의 첨단에서 그녀의 눈에 비치는 노동자는 지배되어야 할, 다스려져야 할 대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십 줄을 넘긴 세상 바닥의 물정은 고사하고 배고픈 설움도 상상 이외의 헤픈 감정으로밖에 느껴보지 못한 그녀가 엿 같은 속내 들켜 똥줄 타는 중이다. 여야를 떠나 저런 서푼 어치도 안 되는 것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명대사는 밥과 하늘을 민중과 동격으로 보았다. 하늘의 노염은 곧 민중의 저항이다. 밥 먹을 때마다 일없이 두런거리다 두 시 방향의 젊은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사람의 습관이란 묘해서 매번 같은 자리에 앉는다. 서너 차례 그녀가 동료 여성들과 얘기 나누며 밥 먹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콧방울이 마늘쪽 같은 그녀는 시부모 앞에서 밥 먹는 새댁처럼 다소곳하게 수저질을 했다. 마주 앉은 동료가 우스운 소리 할 때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식탁 아래로 그녀의 발이 보였다. 시선을 느낄까 봐 아니면 누군가 눈치챌까 더 보지 못하고 밥만 먹었다. 식사 속도를 맞춰 동시에 일어났다. 물컵을 던지고 나가니 그녀는 동료들과 섞여 멀리 사라졌다.
베어링 ⑥
C동은 리어카를 사용해 쓰레기를 나르지만 A, D동은 쓰레기 양이 많아 자신들의 화물차를 이용해 쓰레기를 치운다. 사무실에서 얼마간의 유류비를 준다. 쓰레기 수거장은 후문 쪽에 한 군데 더 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C동의 수거장으로 몰린다. 공장 전체의 면적이 오만여 평이라 한 번 걸었다 하면 이삼백 미터는 족히 걷는다. 수원의 반도체 공장에서 구 년을 일했다는 젊은 조장은 만보기로 측정했더니 어떤 날은 만 팔천 보를 걸었다고 했다. 그는 이 교대의 기계적인 노동에 연애는커녕 자신이 뭘 하러 태어났는지 회의가 든다고 했다. 밥 너머 삶의 가치를 위해 회사를 때려치우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결과는 별무 신통이었다. 그는 다시 반도체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 교대는 끔찍하다고 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총각이다. 작년 시월에 들어왔는데 두어 달 후면 나갈 생각이다. 내게 조장을 맡아 관리하시면 딱이란다. 흠... 천만의 말씀.
팀장은 요즘 내게 눈독을 들이는 중이다. 나보다 서넛 위인 그는 이력서를 봤다며 이것저것 기대하는 눈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일머리를 알려주기도 하고 썰렁한 농담으로 날 멋쩍게 하기도 한다. 조장은 조심해서 상대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며칠 만에 영선 미화반 거개의 과정을 꿰었다. 낼은 출근하자마자 예초기를 돌리란다. 동트기 전의 냉기 믿고 움직여도 땀은 막을 수 없을 거다. 별거 아니다. 십여 년 동안 여름이면 예초기를 등에 붙이고 살았으니. 솔개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풀 베다 보면 땀 줄줄 흘러 온몸과 신경까지 젖어버리는 데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살아 있다는 확인이다. 인간은 생각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몸의 인식이 먼저다. 데카르트보다 들뢰즈가 낫다. 데카르트는 관념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