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어른인 우리가 안 괜찮은 걸 수도 있다.
우리가 조금 더 보호해줘야 할 존재가 된 나의 반려견 메리. 갑작스러운 메리의 시력 저하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울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마음을 다잡는 게 이렇게 또 어려울 수 있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존재의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일은 내가 아픈 것보다 더 힘들고 아프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의 큰 두려움이 하나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옆에 계실 때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저 멀리 보이는 ‘장례식장’ 글자만 봐도 고개를 돌렸고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언젠가 마주할 순간을 꽤나 오래전부터 염두했고 또 피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이제 장례식장은 그냥 장례식장일 뿐이다.
할머니의 죽음이 가슴이 사무치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슬픔이었기에 앞으로 마주할 그 어떤 이별도 무섭지 않았다. 나에게 할머니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없으니까. 그 후 2년이란 세월이 지나 할머니 다음으로 잃을까 두려운 존재인 메리가 할머니처럼 노쇠해지고 있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기까지 내 눈물은 마를 날이 없을 것만 같다.
모든 감정을 ‘짜증’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감정 표현의 방식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나는 기쁜 감정과 슬픈 감정만큼은 표현이 또렷한 사람이다. 기쁠 때는 웃으면서 생각한다. ‘와, 나 정말 즐겁구나!’, 또 슬플 때는 엉엉 울면서 ‘나 너무 슬프다.’라고 표현한다. 최근에는 후자인 경우가 많았다.
명휘 면접 준비를 도우러 서울에 같이 다녀왔다. 그날 밤에도 언니랑 있는 메리의 사진과 영상을 카카오톡으로 전달받고 메리가 마음에 쓰여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보며 명휘는 ‘메리는 메리야. 보이든 안 보이든 어차피 니 껌딱지잖아.’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눈이 보이든 안 보이든 메리는 메리인데, 그리고 또 내 껌딱지인데. 뭐가 문제라고. 어쩌면 메리는 괜찮은데 어른인 우리가 안 괜찮은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