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만나러 가야 되는데 택시 안 잡혀서 못 만나고, 싸우다 맞아 죽고, 한 시간마다 화장실 가는 드라마"를 본 적 있는가.
드라마든 영화든 사람 사는 세상을 반영하지만 주요 메시지를 위해 '연출된 현실'을 가공한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 속아주거나 어떤 때는 말 안 되는 스토리임에도 빠져들어 현실을 잊고 만다. "죽도록 맞아도 안 죽어, 손만 들면 택시 잡혀, 지구 상 어디에 있어도 주인공은 우연히 꼭 만나" 공식을 꾸준히 학습한 똑똑한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연출가의 선택은 두 가지다. 확실하게 속이거나 어설프게 속여도 공감을 받거나.
장장 2시간 반짜리 독립영화에 13만 관객이 들고, 전 세계 영화제에서 입소문을 내며 25개 상을 휩쓴 <벌새>의 저력을 나는 '지극히 평범하기 위해 애쓴 연출'에서 찾았다.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기록적 폭염. 한국을 뒤흔든 사건들이 영화의 배경인 1994년 한 해에 한꺼번에 터졌다. 그럼에도 영화는 엄청난 사건들을 대상화하거나 극적 요소로 활용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듯 보인다. 그저 중2 사춘기 여학생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 큰 진동, 깊은 흔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더없이 평범한’ 은희의 존재가 1994년을 통과하지 않은 세대와 한국을 모르는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흔든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가지런한 치열의 배우들에 익숙해진 눈에 다듬지 않은 눈썹, 대충 탄 가르마는 우리가 그간 모른 척 속아온 것들과 결이 다르다.(화장 안 지우고 잠들기, 집에서도 외출복 입기 등등)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는 듯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앙큼한 연출. 맨 팔뚝으로 단짝을 툭 칠 때 살과 살이 부딪는 소리(실제 이렇게 크게 나지 않는다), 하얀 머리카락 같은 가래떡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떡국용 떡으로 잘려 나오는 장면, 좁은 식탁에 모인 가족들의 젓가락이 사기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의 울림. 온갖 걱정을 잊게 하는 ASMR, 단순 노동 힐링 영상의 힘을 빌렸달까.
(<벌새>에 인위적인 사건의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에 상처 받고 또 그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 은희의 시선 속에서 유독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발뒤꿈치 올이 나간 스타킹을 신은 엄마의 뒷모습, 한없이 엄하던 아빠가 딸의 수술 걱정에 애처럼 엉엉 우는 소리, 나밖에 없는 것 같던 단짝이 언제고 배신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안 보이던 것들이 폭우가 쏟아지듯 한꺼번에 덮칠 때, ‘인간’의 눈을 뜨는 생경함과 두려움을 알기에 은희를 응원하면서 비슷한 시간을 통과한 나를 보듬게 되기 때문 아닐지.
마음이 몽글몽글하면서 따끔따끔하기도 하고, 왜인지 용기가 생기는 이상한 아침이었다.
덧.
월드타워 롯데시네마 조조영화 보러 가는 팁을 소개한다 상영관이 많지 않아 맞는 시간대와 가까운 영화관 찾기가 별 따기였다. 지하철역 지하 통로는 이용 불가하니 잠실역 1번 출구로 나와 한참 걷다가 타워 빌딩들이 둘러싼 광장 같은 곳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턴, 또 직진하다가 유니클로가 보이기 직전 건물의 가장 오른쪽 유리문을 통해(이 문만 열려 있음) 들어갈 수 있다. 이 유리문을 찾으려 해도 지도 앱으로 찍을 수 없어 직원 넷을 잡고 물었고(이 중 2명은 본인도 잘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게 다였다), 겨우 광고시간 안에 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설명도 말이 안 되지만 혹 도움이 될까 하여.. 조조영화는 보지 말라는 건지. 조조러들이 서럽겠다. 영화관에는 나 포함 다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