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명이 다한 공간의 미학
보장암 국제 예술촌(Taipei Artist (Treasure Hill) Village), 대만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고 소박한 마을이다. 원래 1960년대 경 군인들이 주로 모여살던 달동네, 판자촌 같은 곳이었는데 2006년 말부터 시정부 주관으로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했다. 시정부에서 낡은 공간을 개조한 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싼 임대료로 제공해준 것이다. 덕분에 달동네에는 하나 둘 신진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보장암 국제 예술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보장암 국제예술촌은 한국의 벽화마을들을 닮았다. 또 을지로 3가, 종로 3가 근처의 뒷골목을 닮은 구석도 있다. 그러나 들어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사찰과 열대식물들, 번체자 간판들과 회색빛 느낌은 대만만의 고유성을 뚜렷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사찰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예술촌이 시작된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세련되고 젊은 위트가 흘러넘치는 광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국제 예술촌 곳곳은 전시, 워크샵과 같은 예술 행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식당과 카페 역시 다양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예술촌 초입에 있는 "Poetry Coffee"로 황급히 향했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기엔 굉장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다양한 예술 소품과 벽면에 걸려진 몇 수의 시, 책장 가득한 책들과 보드게임까지. 비를 피해 오랜 시간을 나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공간이었다. 보장암국제예술촌과 금새 흠뻑 사랑에 빠져 버린 나는 그에 관해 이것 저것 생각해보다가 왜 다 죽어가는 공간이 흔히 "힙"한 곳으로 사랑받게 되고 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할렘가, 폐공장부지, 달동네. 물론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값싼 임대료 덕분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낡고 생기를 잃어버린 공간들, 이미 수명을 다해버린 공간들이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었다.
쉬지 않고 파도가 철썩대는 바다를 바라보면 모든 것을 잊기 마련이고, 흥겨운 축제는 이 맛에 살지 하는 마음을 느끼게 한다. 낡고 생기 잃은 공간들, 수명을 다한 공간들을 보며 우리는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는 걸까?
낡고 생기를 잃어버린 곳. 정확히 말하자면 "희망"을 잃어버린 공간에서 내일은 사치와도 같다. 이미 수명을 다한 공간에서 내일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생계가 걸린 오늘이고,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오늘만이 절박하고 쓸쓸하게 존재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내일만 바라보며 오늘 같은 것은 없는 우리에게 오늘을 직시하게 해주니까. 미래만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우리에게 달동네의 오늘은 간절하고 치열하게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그래서 낡고 생기를 잃은 공간들, 내일이 없는 공간들이 "힙"한 곳으로 변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보장암 국제 예술촌에서의 시간은 그저 그 공간만 생각하게 해주었으니까, 불투명한 미래도, 답을 찾지 못하겠는 고민들도 뒤로 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