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대만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의 숲 Sep 11. 2017

<4> 타이페이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

- 시간에 관하여 

  개강을 했다. 비록 교환학생 신분이지만 다시 신입생이 된 것마냥 긴장한 채로, 설레는 채로, 얼빠진 채로 캠퍼스를 거닐어보았다. 동아리를 홍보하며 잔뜩 신이 난 대만대학생들을 보며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에 서툴렀고, 멋몰랐고, 마음 한 쪽이 어딘가 부풀어 올라있었던, 조금은 부끄러운 시간들.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르는 그런 시간들. 그러다 문득 우리 모두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웃고 소리치는 대만대학생들을 보며 조금은 부끄러운 그런 시간들을 보낼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시간들을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런 행복한 마음 때문인지 간밤에는 꿈에 친구들이 나왔다. 우리는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처럼 어울렸고, 떠들었고, 북적였고, 소리쳤다. 웃고, 울고, 술을 마셨다. 스무 살에 만났던 우리가 어느새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언저리가 되었고 어느덧 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친구가 되었다. 부끄러운 시절을 보냈고 철없는 방황을 일삼던 우리는 그 때와 조금은 달라졌다. 시간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시간에게는 선의도 악의도 없었다. 우리 역시 시간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에 놀라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는 오랜 친구가 되었다. 오랜 친구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참으로 놀랍기 마련이다. 언제 봐도 한결같은 그 느낌. 언제 봐도 처음 그 사람을 만난 그 때로 돌아가 있는 그런 느낌.

      

“우리는 왜 변하지 않을까. 웃기고 신기해.”


오랜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물어봤었다. 시간이 우리에게 악의를 갖지 않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마음이 얼마나 값지고 얻기 힘든 것인지 저 한 마디에 모두 느껴졌다. 


“우리는 변하지 않아.”

나는 우리가 아흔 살이 되어도 똑같은 자세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처럼 시간은 멋진 것들을 선물해준다. 오랜 친구,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많은 것들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잔인하다. 청춘의 시간은 지나치게 빠르게 흐른다. 나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열심히 아쉬워하며 과거의 시간을 더듬는다. 홀로 앉아 과거를 더듬는 일은 퍽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오랜 친구와 함께 더듬어보는 일은 언제나 멋지다. 지나치게 빠른 시간도 함께 만든 추억 덕에 견딜 수가 있다.      



  시간의 속도가 같지 않은 것처럼, 시간의 농도 역시 같지 않다. 어떤 날은 맹물처럼 흘러가 버리지만 어떤 날은 잔뜩 농축된 채로 느리게 흘러간다. 많은 것들이 담겨진 채로. 몇 년이 흘러서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들을 몇 시간 안에 깨닫기도 하고, 하루가 걸려도 못할 말들을 단 몇 분 안에 해내는 날들이 있다. 대만에 온 지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날들은 하루하루가 꽉 찬, 농도 높은 날들이었다.

     

  화살처럼 빠른 청춘의 이 시간들을, 잔뜩 꽉 찬 하루하루의 이 시간들을 분명 그리워할 것 같다. 어쩌면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미 그리움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맘껏 그리워할 수 있도록 성실히 사랑할 것이다, 타이페이의 지금을. 


타이페이에 오게 되면서 보게 된 하늘
저녁 하늘을 올려다 본 건 참 오랜만의 일


매거진의 이전글 <3> 타이페이 보장암국제예술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