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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의 숲 Oct 28. 2017

<18> 다이어리

 


  오늘 중요한 연례 행사 하나를 끝냈다. 타이페이에 오게 된다면 이 곳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일. 2018년 다이어리를 사는 일이다. 


비록 2017년이 두 달이나 남았지만, 문구점들은 이미 2018년 다이어리 기획전을 시작했고,  매 해 다이어리 사는 것을 크리스마스만큼이나 기다리고 좋아하는 나는 지체할 수 없었다. 2018년 다이어리는 2017년 다이어리보다 조금 작다. 가죽 커버였던 2017년 다이어리와는 다르게 딱딱한 하드커버다. 우선 커버의 2018년 표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딱 한 번뿐인 해, 그 유일성을 강조하는 느낌. 그리고 깔끔한 속지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대만에서 사는 것 인만큼 "made in taiwan"이라는 것까지.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2018년 다이어리로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완벽함이었다. 


  

  나는 다이어리에 유독 집착하는 편이다. <기록>을 굉장히 중요한 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시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이름붙여지지 않은 시간들이 두렵다. 그저 흘러가 버린 시간이 되는 것이 두렵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내게 발생하는 사건, 그 공간과 시간, 그 때의 감정과 느낌, 생각, 이 모든 것에 대해 예민하고 싶다. 나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정의를 내리고 싶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오늘>이라는 사건이 미해결로 남아있는 것이 싫다. 


그렇기에 나는 매일 <오늘>이라는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형사가 된다.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나를 관통하기 전에 그를 붙잡는다, 기록함으로서. 다이어리는 이런 내게 핵심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다이어리를 사면서 새로운 바램을 가져보았다. 2018년에는 시간이 나를 데려가는대로 둬보자고. "너무 깊이 생각하지말라"던 김광석의 노래처럼, 때로는 어떠한 의미부여도, 정의내림도, 명명의 순간도 없이 있어보자고.  때로는 그저 흘러가는대로 두는 게, 나는 어떠한 자유의지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구는 게, 시간이 나를 조종하는대로 끌려가는 게 나은 순간들이 있을 거라고. 


  대만에 온지 두 달이 되어가도록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면 2-3주 간격으로 찾아오는 구토감이다. 음식이 몸에 맞지 않는 것인지 먹을 때는 잘 먹으면서 꼭 물갈이를 한다. 구토감은 정말 기분 나쁜 감정인데, 나는 그것이 정의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위로던 아래로던 배출되지 못하고 목구멍과 심장, 배 언저리에 머무르는 묵직한 느낌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시간들과 비슷하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의내릴 수 없는, 어딘가 붕 떠 있는, 꿈꾸는 듯한 시간들은 구토감처럼 나를 힘들게 한다.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도 되는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에게 항복해도 되는가. 이 명명되지 않은 시간들을 마주할 때면 토할 것 같다. 물갈이를 할 때처럼. 


  그래서 나는 2018년 다이어리를 사며 바래 보았던 것이다. 때로는 이름 붙여지지 않은 시간들을 내버려 두자고. 시간과 싸우며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보람차지만, 그것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순간들 역시 분명히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정의내려지지 못한 시간들에 불안해하지말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감정들 사이에 정답을 찾으려 하지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도 해보자고 바래보았던 것이다.  


  2018년의 다이어리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질지 모르겠지만, 이번 해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래본다. 우선 2017년의 남은 두 달부터 그렇게 보내보고자 한다.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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