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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Oct 15. 2020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이번 가을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다. 길고 긴 겨울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당황하지 않도록, 슬그머니 "이제 조금씩 추워질 거야" 하고 미리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가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며칠 전 동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분한 동네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가끔씩 의식적으로 풍경 사진을 찍는다. 처음 미국으로 이사를 왔을 때,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거긴 어때? 사진 좀 보여줘 봐" 하고 궁금해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텅 비어 있는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면서 민망한 기분이 들곤 했다. 여행이 아닌 일상이 되어 버리고 나니,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도 옅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의식적으로라도 동네 사진도 공원 사진도 찍어두려고 한다. 


그런데 저 사진을 찍고 난 뒤, 내 마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날의 산책 끝무렵, 나는 그저 그 차분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사진을 찍었던 것인데,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화창한 날 나와서 다시 찍어야겠다"였다. 흐릿한 회색 하늘 대신, 청명하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색색의 단풍을 찍어두었다가,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보여주어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니?"하고 타국 생활중인 나의 안부를 물어올 때면,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파란 하늘과 초록 나무들이 싱그럽게 반짝이는 고운 사진들을 골라서 보여 주면서, 그것으로 그들의 걱정을 안심시키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있었다. 우울하고 쓸쓸하게 지내는 느낌을 주면 걱정할 것 같아서, 사진첩에서 가장 밝고 고운 사진들을 공유하곤 했다. 


또, 그들에게 내가 사는 이 곳은 낯선 미국의 어느 시골일 테니, 몇 장의 사진으로나마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주고 싶기도 했다. 예쁘고 멋진 사진을 보여주면, 내가 사는 곳이 유명한 도시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다지 걱정스럽고 쓸쓸하고 외로운 곳은 아니라고 안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어쩌면 집착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잘 지내고 있음을 알려서 나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언제나 파란 하늘 아래 평화로운 사진만 찍어서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유난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다가 핸드폰을 들고나가 똑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색감 고운 단풍나무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이면 얼마나 멋진 사진이 나올까 상상하면서. 


그런데, 몇 번을 다시 찍어보아도, 그 전 날에 찍었던 흐린 하늘의 풍경 사진만큼 멋있는 느낌의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화창한 날씨와 눈부신 하늘에 대한 나의 집착이었던 것이다. 






요 며칠 사이에, 자주 연락하지 않는 지인들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몇 통 받았다.


"잘 지내요?"


짧은 인사말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13시간의 시차를 사이에 두고서 가볍게 전송하기에는 쉽지 않은 메시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영어에 좌절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한국말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래서, 과제를 하던 복잡한 마음을 잠시 멈추고, 메시지를 천천히 읽고 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하는 마음이 앞서서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하고 괜히 더 씩씩하게 대답했다. 또, 사진첩을 열어서 색감 고운 가을 사진을 고르려다가 며칠 전에 찍은 흐린 하늘 사진이 눈에 밟혀 멈칫했다. 


사진첩을 닫고, 통화 버튼을 눌러 오랜만에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옛날이야기도 하고, 현재의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나의 한숨을 눈치챈 한 친구는 "답답하면 한국 와서 쉬었다가 가. 맛있는 거 매일 사줄게."라고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 누구도 나의 타국 살이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는데도, 나 혼자서 그런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친구들이 "잘 지내?"하고 안부를 물을 때, 그것은 "잘 지내야 해!"하는 당부가 아니라 "어떻게 지내? 괜찮아?"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는데, 나는 경직된 자세로 "예썰!" 우렁차게 외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늘 오후의 산책 동안 미셀 오바마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그녀의 친오빠가 게스트로 나와서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쾌하고도 의미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미셀은 그들의 아버지가 몸소 가르쳐 주신 삶의 지혜를 공유해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필요할 때에 곁에 있어주는 것. 


엽서 같은 사진을 찍는 것에 집착하는 대신, 나는 "잘 지내요?"하고 내 사람들의 곁에 다가서야 했다.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다는 핑계로, 그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 오후도 그 날처럼 흐리고 바람도 꽤 많이 불었다. 그럼에도 몇 장의 흐린 하늘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반성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도 잘 지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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