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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Oct 25. 2020

평생 처음 해보는 일

동네마다 크고 작은 호수를 끼고 사는 이 곳 사람들에게 여름은 5월 말의 현충일 Memorial Day부터 9월 초의 노동절 Labor Day까지로 정의된다.


맥주 한 병 들고 호숫가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을 즐기느라 바빠서, 여름 동안은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이 곳의 여름을 사랑한다.


건강한 초록색으로 뒤덮인 풍경 아래, 트레일러에 개인 보트를 장착하거나 카약을 동여맨 자동차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여름 내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덩달아 매일이 휴가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번 9월 노동절 휴일은 마치 한 여름의 어느 날인 것처럼 더웠고, 마지막 여름날을 즐기기 위한 온갖 종류의 보트들이 호수 위를 떠다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하나둘씩 보트를 정비하여 창고에 보관하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동안에만 문을 여는 보트 전문점이 분주하게 시즌을 마무리하는 동안, 하나둘씩 문을 열고 가을에만 반짝 활기를 띄는 가게들이 있다. 그것은 근교에 흩어져 있는 사과 농장들이다.


마트에 가면 여러 종류의 사과를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긴 하지만, 가을 수확철에는 농장들이 문을 열고 직접 손님들을 만난다. 아이들을 위한 사과 따기 체험도 있고 넓은 밭에 흩어져 있는 펌킨 중에서 할로윈 장식용 펌킨을 고르기도 한다.


그러나 농장에 가는 진짜 목적은 애플 핫 사이더와 시나몬 도넛을 먹기 위해서이다.


나에게 익숙한 "칠성 사이다"의 사이다가 아니라, 착즙 애플 주스에 이런저런 향신료를 넣고 끓인 것인데 즉석에서 튀겨내는 꾸덕한 도넛과 같이 먹으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인기가 좋은 농장은 주말에 가면 길게 줄을 서야 하기도 하고 도넛이 품절되기도 한다. 그렇게, 여름 내내 주말마다 호수를 즐기던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사과 농장으로 주말 나들이를 간다.


그도 나도, 달달한 주스나 도넛을 일부러 찾아 먹는 입맛은 아니면서도, 9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올 해는 어느 농장을 가볼까? 생각하게 된다. 짧은 드라이브 삼아 가을빛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농장에 가서, 뜨거운 핫사이더 한 잔과 함께 도넛 한 개씩 먹는 것이 우리끼리의 가을 의식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갤런 단위로 애플사이더를 사고 12개짜리 더즌으로 도넛을 포장해가는데, "도넛 두 개랑 핫사이더 두 잔 주세요."라고 주문할 때마다 직원들은 신기하다는 듯 재밌다는 듯 우리를 쳐다본다. 반대로 그걸 보는 것도 신기하고 재밌다.




작년에 우연히 발견했던 조그마한 농장이 있었다. 꼬마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 같은 건 없지만 시냇물이 흐르는 조용한 동네에 150년 되었다는 목조 건물이 울창한 숲 속에 살며시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었다. 몇 남지 않은 수력 발전 농장이라고, 히스토릭 빌딩이라는 사인이 세워져 있었다.


작년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려서 오래 머물지 못했기에, 시냇가를 따라 산책도 해보자고 내년에 꼭 다시 오자 했던 곳이다.


걸을 때마다 삐걱, 오래된 나무 바닥이 소리를 내는 조그마한 공간에 일 년 만에 들어가, 핫사이더 두 잔과 도넛 두 개를 샀다. 그리고 이번에는 탐스럽게 반짝이는 사과 한 꾸러미도 샀다.


농장 벤치에 앉아, 핫사이더 호호 불며 도넛을 먹던 중에 불쑥 그가 말했다. "당신, 애플파이 만들어도 되겠다."


평소에 과일을 잘 챙겨 먹지 않는 그의 눈에 내가 고른 사과 한 꾸러미는 "저걸 어찌 다 먹나"로 해석되었고, 많은 사과를 한 번에 처리할 방법으로 애플파이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도 나도 디저트나 파이류를 굳이 찾아 먹지 않기에 "뜬금없는 소리군" 하고 흘려 들었는데, 진짜, 한 번 해볼까? 싶은 마음이 뒤늦게 솟아났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날 밤, 애플파이를 구워냈다. 인터넷에 떠도는 "할머니표 오리지날 애플파이" 레시피가 수만 개는 될 것 같았지만 제각각 방식이 달랐다. 레시피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감으로 눈대중으로 필링도 만들고 크럼블도 만들었다.


생각보다 쉬웠고,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노릇하게 구워져 나온 파이가 식는 동안, 파이 사진을 콜라주로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이 문득 우스워서 '이게 뭐라고 어디다 쓰려고 이러고 있나'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묘하게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그에게 "내 평생에 처음 만들어 본 애플파이야."하고 말하는 순간, 설렘의 근원을 알아챘다.


아직도, 마흔이 되어서도,

평생에 처음인 일들이 있다는 것.


그 신선함이 주는 설렘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마음이 간질간질했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 내가 모르는, 해보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기대마저 생겼다.




여름이 끝나고, 곱게 물들던 단풍도 서서히 낙엽으로 떨어지면서 고즈넉한 가을도 서서히 겨울로 향해 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열렬히 여름을 즐긴 이 곳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춥고 흐리고 지루한 이 곳의 겨울을 우울해한다.


그래서 11월을 앞두고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했다. 길고 긴 겨울 동안, 이번에는 또 코로나까지 함께 일 텐데, 얼마나 혹독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 안에서 쓸쓸한 격리 생활이 시작되는 건 아닐지, 나에게도 우울함과 무기력증이 찾아오는 건 아닐지.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얹어서 평생 처음 만들어 본 애플파이 한 조각을 싹싹 긁어먹으면서 생각했다.


아직도, 마흔이 되어서도,

평생에 처음 해 보는 일이 있다는 것.


그 사소한 첫 경험에 마음이 간질간질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설렘 한두 조각이면 길고 긴 겨울도 그럭저럭 견딜만하지 않을까.


어쩌면 겨울을 대비하는 것은,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소소한 첫 경험들을 시도해보려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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