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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an 22. 2021

미완(未完)의 바나나케이크

미완(未完)이라고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일곱 번 하고도 두 번을 더 만들었다. 제대로 시작해서부터가 그만큼이니 실은 그보다 더 만들었다. 천제적인 셰프들은 한두 번 만에 척척 레시피를 만들어낸다던데 나는 열댓 번을 더 만들어도 답이 안 난다.(나는 천재가 아님엔 틀림! 없다) 아.. 더 이상은 못 하겠는데... 스멀스멀, 재능은커녕 근성도 없는 게 아닐까라는 심란하고도 서글픈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달아진 혀끝은 10번과 9번의 차이를 잡아내지 못하고 가득 찬 위장은 더 이상의 케이크를 거부한다. 아휴 모르겠다. 포기다 포기. 어제 만든 케이크, 그 전날 만든 케이크, 그 전전날 만든 케이크에 지난주, 오늘 만든 케이크까지. 비슷비슷하게 생긴 케이크들이 테이블 가득이다. 조각조각 난 케이크들은 꼴도 보기 싫고 바나나 단내는 맡기도 싫다. 그렇게 내 미완(未完) 컬렉션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완성하지 못한 케이크는 정복하지 못한 산과 같다. 얼마 전부터 파운드케이크가 만들고 싶더니 바나나케이크가 또 눈에 아른거린다. 정말 맛있는 바나나케이크. 덜 달고 더 건강하게, 맛있게 만들어봐야지. 바나나는 냄새도 맡기 싫던 과거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맛있겠다. 또 시작됐다. 맛있는 바나나케이크가 만들고 싶어졌다.


노트를 펼쳐 미완의 기록들과 기억을 더듬는다. 레시피 곳곳에 파란색으로 그 날의 기억이 적혀있다. 6번 바나나는 조금 떡졌고 7번 바나나는 되려 너무 가벼웠다. 하루 지난 6번은 향은 진해졌지만 식감은 별로. 테스트들의 맛과 향과 식감 등등이 날짜별로 빼곡히고 적혀있다. 심기일전. 레시피를 교정하고 계량을 시작한다. 검게 익은 바나나도 충분히 많다. 슥슥 반죽을 만들고 오븐에 넣는다. 봉긋 부푼다. 느낌이 좋다. 한 김 식혀 곧장 잘라먹어본다. 음 향도 맛도 합격이다. 우물우물 씹으며 파란 펜을 든다.


파운드케이크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야 진짜 제맛을 보여준다. 갓 만든 파운드는 가볍고 보송보송하고 하루 이틀 지난 파운드는 조밀하고 촘촘해져 묵직하게 촉촉하다. 그러니 오늘의 합격이 내일의 합격일지는 모르는 일이란 말씀. 그래도 지난번보다 만족스러운 맛이 나와 이번엔 완성될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내 바나나케이크 레시피가.


시도들은 헛되지 않는다. 바나나와 버터, 수많은 미완(未完)들이 내 어딘가 숨어있다 다시금 이어진다. 오늘의 바나나케이크가 미완일지라도, 오늘의 파운드는 지난번 파운드보다 조금 더 완성에 가깝다. 완성에 가까워지지 않아도 좋다. 미완이라고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케이크를 만들며 즐겁고 고달프고 뿌듯한 이 시간들이 완성이 아니면 어떻고 미완이면 또 어떠랴. 내 곳곳의 미완들이 조금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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