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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Aug 06. 2024

순수악의 시절

Episode 19. 잠자리

운전 중에 종종 화살기도를 한다. 로드킬 Roadkill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비명횡사한 영혼을 위로하고, 내 차 앞으로 느닷없이 야생동물이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짧은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로드킬 경험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고라니나 멧돼지는 아니지만 날벌레 정도라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사실 내 화살기도의 시작도 어느 날벌레의 죽음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장마가 지나고 나면 땅에서는 버섯이, 하늘에서는 잠자리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길고 긴 여름방학. 어릴 적에는 몇 주씩 시골의 할머니댁이나 큰아버지댁에 보내지곤 했다. 나이 많은 사촌들의 보살핌 속에서 반벌거숭이 상태로 온몸이 시커멓게 탈 때까지 뛰놀았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서는 더 이상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사촌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무덥고 무료한 방학 동안 우리 동네에서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곤충채집. 곤충들이 무엇을 먹으며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표본으로 만들어보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친구들과 얼마나 잠자리를 많이 잡는지 내기를 했다. 해질 무렵 좁은 채집통 안이 가득 찼다. 잠자리 대부분은 죽어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일 또 잡으면 되니까.


지금껏 이런저런 실수를 하며 살아왔지만, 그 순수악 純粹惡의 시절만큼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재미 삼아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물론 얼마 전까지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 무의식 속에 커다란 죄의식으로 묻혀있으리라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몇 해 전 8월이었다. 수목원 습지식물원에서 금꿩의 다리 -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우리나라 자생식물 - 를 관찰하던 중이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인기척은 없었지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커다란 장수잠자리 한 마리가 있었다.  


공중에 정지비행을 한 채로 짙은 초록색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무의식 깊이 묻어두었던 죄의식이 불쑥 솟아오른 것이.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장수잠자리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받았다. '뜻하지 않게 생명을 잃은 동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그렇게 해서 화살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애들에게도 쉽게 잡혀서 그렇지 사실, 잠자리는 동물계에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내추럴 본 킬러 Natural Born K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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