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0. 붉나무
미지근하고 끈적한 것이 새끼손가락 끝에 모여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진다. 느닷없이 코피가 흘러내릴 때와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머리끝에서 팔뚝에서 아니, 내 몸 전체에서 땀이 솟아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거대한 숯가마에 들어와 앉은 것 같다. 바람이 없으니 그늘도 소용이 없다. 비구름이 한껏 올려놓은 습도 때문에 숨쉬기마저 쉽지 않다. 이제 막 차에서 내려섰을 뿐인데.
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 평균기온은 25.6도로 역대 최고. 폭염일수는 24일로 역대 3위. 열대야는 전국 평균 20일로 평년의 3배 수준 - 서울은 39일, 제주는 무려 56일 - 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복음처럼 떠받드는 시대에 들어섰지만, 세상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을 연료 삼아 돌아가는 중이다. 차로 돌아와 머리를 식히고 땀을 닦고 식염포도당 한 알을 꺼냈다.
소금은 바다에서 혹은 바다였던 곳에서 나온다.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자염, 염전에 가둬 만드는 천일염, 바닷물을 여과해 만드는 정제염, 광산에서 캐내는 암염 등이 대표적. 우리나라에서 '소금'하면 당연히 천일염을 먼저 떠올리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가장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은 암염 - 총생산량의 약 60% - 이다. 불순물이 거의 없고 운반과 가공이 쉬운 것이 장점.
세계적으로 독특한 소금생산지를 꼽으라면,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 Uyuni Salt Flat 그리고 페루의 마라스 염전 Maras Salt Ponds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유니 소금 사막은 해발 3,600미터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두께 1미터에서 120미터에 이르는 소금밭의 크기는 우리나라 경상남도와 비슷하다고...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된다. 소금 사막은 평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가 내리고 난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바뀌는데, 그 너비가 무려 129Km.
해발 3,200미터에 위치한 마라스에서는 12세기 이전부터 소금을 생산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가 아닌 고원에 염전이 생긴 이유는 염분이 녹아있는 지하수 때문. 안데스산맥의 지하수가 암염지대를 지나며 소금물이 되었던 것이다.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5천 여개의 계단식 염전에서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아주 특이한 소금이 있다. 나무에서 열리는 소금.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데, 가지 끝에 작고 하얀 꽃들이 트리 모양으로 달려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열매가 익을수록 하얀 가루가 표면을 덮는데 소금처럼 짠맛이 난다. 소금이 귀한 산촌에서는 이것을 물에 녹여 소금 대용으로 쓰였다고.
이 나무에는 소금만 달리는 게 아니라 '오배자'라는 귀한 약재도 달린다. 오배자는 이 나무에 기생하는 진딧물에 의해 잎줄기가 부풀어 올라 만들어진 '벌레혹'으로, 예로부터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으로 그리고 염색의 재료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나무의 가치는 빛깔에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짙은 초록의 잎사귀가 맑고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는 이름이 '붉나무'.
흔히 보이는 키 작은 나무가 이렇게나 쓰임새가 많고 예쁘기까지 하다니. 가을 숲 속의 빛과 소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1966년 방영된 스타트렉 Star Trek 오리지널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빨판이 달린 손으로 인간의 몸에서 순식간에 염분을 앗아가는 외계인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