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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는 것도 시작만큼 어렵다

가을이다 가을_02

by 포에버선샤인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작'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일단 '시작'만 하면 반은 한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니 말이다. 그러나, 시작만큼 어려운 것이 그만두는 거다. 준비 과정이 길고 목표가 높을수록, 일단 시작하면 그만 두기가 더 어렵다. 목표달성에 대한 성취욕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그만두는 것을 어렵게 한다.


박사과정을 밟은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유망한 분야로 공부를 하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전망이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분야가 나에게 그다지 맞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일반적인 수준의 공부는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나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더 파고들어야 할수록, 더더욱 열정이 필요하다. 열정은 보통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일어난다. 하면 할수록 안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디테일이 강하지 않은데 박사과정 분야는 차분하고 꼼꼼하고... 정말이지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연구분야였다.


계속하기가 싫었다. 어려웠다. 내가 이렇게 하소연하면, '박사공부가 쉬운 게 어디 있겠냐~ 너만 힘든 거 아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흔히 듣는 반응이다. 부모님도 계속하라 하고 나도 그동안 한 게 아깝기도 하고 그런데 계속하자니 죽을 맛이고... 내 힘으로는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갔다. '그분이 오셨는지'는 모르겠다. 점술가의 말은 아주 평이했다. 책으로 사주풀이하는 사람 같다. 그동안 한 게 아까우니 계속하란다. 나는 내심 '그 길은 네 길이 아니야, 딴 길에 들어가 개고생 하고 있구나~'하는 말을 듣길 바랐나 보다. 그 말을 핑계 삼아 그만두고 싶었었다. 그러나 점술가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또 다음 학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의 길이 펼쳐졌다. 연구 펀드가 끊겼다. 교수님은 돈이 없어서 이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니 다른 교수에게 가라고 한다. 아니 지금까지도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버텼는데 다른 교수 밑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인가? 그러면 언제 학위를 끝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학회지에 내려고 정리해 두었던 논문을 교수님이 보더니 이걸로 석사 학위를 받자고 한다.


박사는 모르겠고 일단 석사를 줘서 내보내려는 의도다. 박사를 계속하고 싶으면 다른 교수에게 가서 계속하라는 말이다. 역시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가는 걸까?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둘 용기가 없어 그만두지 못하니, 상황이 내가 그만둘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간절히 바라면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돕는다'는 더 시크릿의 내용이 떠오른다.


그만두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녔던 나의 박사과정은 이렇게 석사학위로 끝이 났다. 그러나 마음이 마냥 홀가분했던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그리고 나 자신도 박사학위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터라 '중도포기'가 스스로도 좀 힘들고 실망스러웠다. 그때 힘들었어도 더 참고 끝까지 해 보았어야 했나? 나는 중도포기자인가? 하는 물음표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한동안 불면증과 이명으로 잠을 못 자는 나날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두기를 잘했다.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지 못해 질질 끌려다니던 시기에 만났던 친구가 2년 후에 한 말이 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큰 병이 났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힘들었었다. 더 했으면 박사과정 끝내기 전에 스트레스로 암이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신의 직장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에도 박차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보고 '복에 겨웠구나'라고 말들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표를 제출하는 선택이 입사를 위한 노력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를 떨치고 나오는 것은 많이 힘든 일이다.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그만두는 것이다. 시작할 때의 두려움과 설렘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 있게 그만둔 여러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 용기를 가지고 자기에게 맞는 것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말하면, 한번 지나온 길은 '복기'는 할지언정 '후회'는 말자. 그 경험을 앞길의 비료로 삼아야지 그 경험이 앞으로 향하는 내 발목을 잡도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만두는용기 #사회적인기대 #성취에대한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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