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사라질 시간이야.
2/3일 (Fri) PM 10:03
<2023년 입춘>
봄이 오는 소리에 잠을 깼다.
오한이 서리듯 으슬으슬 추운 느낌에 불현듯 달력을 바라봤다.
“아.”
외마디 탄식.
달력에 보이는 빨간 동그라미가 생경하다.
길지도 않은 탄식에 고개를 살짝 저어내 멍하니 달력을 쳐다본다.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더 따뜻한 오늘의 날씨에 눈사람은 잠시 몸을 떨었다.
올해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전혀 이상할 리 없다는 듯이 불편한 기시감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매번 맞이하는 죽음이건만 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차가운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아
이질적이라 느낀다.
“내가 심장이 어디있담.”
본인이 생각해도 우스운 소리였다.
사람의 손에서 빚어진 자신의 생이 매번 겨울마다 계속되기 시작한 건 기억도 나지 않을 시간이 흐르기 전의 그날이었다.
진정 순수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라며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는 그날.
겨울은 공평히 모두를 대했다.
그에게서 태어난 눈 또한 덩달아 모두에게 항상 공평했다.
공평히 내리는 눈은 달동네까지도 손을 뻗어 제 따뜻한 눈송이가 그 좁은 구석 어디라도 닿지 않는 곳이 없게끔,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느릿하게 내렸다.
그때, 내리는 눈송이에 이른 잠을 자고 있던 꼬마 숙녀가 눈을 떴다.
눈을 가장 좋아하던 그 소녀는, 헐레벌떡 옷을 입고 총총거리며 뛰어나왔다.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하늘을 향해 말간 웃음을 내보인 탓이었을까.
그 웃음에 하늘이 감동했던 걸까.
그저 그 순수한 마음을 높게 사 신께서 그 마음 잊지 말라며 그런 약속을 하신 걸지도.
네가 창조한 순수함의 산물이니 잊지 않게 매년 하얀 눈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겠노라고.
덕분에 그즈음에 맞춰 난 매미 마냥 따뜻한 계절을 땅속에서 기생하다 눈이 오는 날
다시
태어난다.
처음 세상을 바라봤을 때엔 나 또한 세상이 눈부셨다.
내가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인 줄로만 알았기에.
나를 보며 기뻐하는 그 어린아이의 눈망울이 내겐 내 세상의 전부였기에.
처음 맞는 나의 생일.
어쩌면 세상과의 첫 만남, 그 아이와 조우했던, 그날이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내가 가장 따뜻할 수 있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몇 해가 가고 때로는 거무죽죽한 도로변 근처에서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태어났을 때 느꼈다.
난 그저 차갑고, 사람들 발에 채이기 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내리는 와중에도, 녹아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도 사람들은 나를 귀찮고 성가셔한다는 것을.
때로는 그 아이와 비슷한 사람을 힘들게 만나 새로이 태어나도
다른 사람의 발길질에 쉽사리 무너지는 존재라는 것을.
따뜻함을 지니고 살고 싶던 심성과 어긋난 본성에 깊은 상실감을 느끼던 나날,
가장 따뜻한 계절은 깊은 땅속에서 내내 떨다가 결국 가장 추운 날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미움을 받으며 태어났다면 내 차가운 살덩이에 구구절절한 굳은 살이라도
배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지금보단 덜 아프지 않았을까 싶어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외로웠다.
그럴 때마다 눈사람은 맹목적인 죽음을 택했다.
자신의 한기에 볼멘소리 내뱉는 사람들이 제겐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에.
내겐 날 감싸고 있는 살덩이인 눈과 추위는 다른 것이 아닌데.
지겹도록 쓸쓸한 고독사였다.
눈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겨울이 버거워졌다.
덩달아 모두가 원하는 봄을 동경하게 됐다.
차라리, 겨우내 움츠리고 있다가 따뜻한 날씨에 맞춰 싹을 틔워내는 꽃으로 태어나게 하시지.
본 적도 없는 꽃이라는 존재를 갈망하며 눈사람은 점점 야위어갔다.
눈사람이 죽음을 예견한 이 시간
올해는 조금은 다른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겹도록 맞이한 죽음이건만 이토록 생경할 수 있을까.
침대에서 비척비척 몸을 끌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태어난 그 달동네를 기억하려 애쓰며, 조금씩 녹아내려 궤적을 남기는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그래도 한 번쯤은 태어난 곳에 가서 정말로 따뜻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제발, 그때까지만 버티기를.
영겁의 시간 동안 한 번도 든 적 없던 살고 싶다는 마음의 갈망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또 한 번의 낯선 감정.
시간의 촉박함은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달동네에 다다랐을 때 까마득한 계단을 바라보며 여태껏 망설이기만 했던 자신을 이겨내기라도 하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너져가는 다리를 이끌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조금은 달라져버린 장소에 가까워지자 눈사람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심장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곧 죽을 운명 앞에 생명을 느끼다니.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눈사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신의 오랜 숙명임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마침내, 산의 중턱에 도착하자 눈사람 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의 온기가 남은 정자 사이로 보이는 일렁이는 불씨.
눈사람이 말갛게 웃었다.
겨우내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환한 웃음이었다.
처음 나의 조물주와 눈을 맞추며 웃음 짓던 그 자리에 섰다.
자신은 한 번도 따뜻한 사람인 적이 없었다는 게 사무치게 슬펐다.
이번 죽음에서만큼은 따뜻하게 녹고 싶다.
해를 넘겨온 평생 동안을 너무 차갑게만 녹지 않았는가.
아직 남아있는 불쏘시개들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흔들의자에 앉았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일렁이는 심정으로 눈사람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사람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이튿날
눈사람이 녹아 물이 된 자리에는
이름 모를 들꽃의 새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