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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Feb 20. 2023

10

1년을 한 밤으로 치면 우린 고작 열 밤 떨어져 있던 거야



# 17


2011. 06.28 (1996년)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서.
이렇게 문 앞에서 말하는 거라 조금 미안하다.

지금은 당신의 밤들이 안온한지 조금 궁금해.

여태 밤에 앓느라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잖아. 안녕해?


2011. 09.29 (1965년)


 내 불행의 시작을 당신이라고 생각했어.
 철없고 조금 반항적이고 어리석었어.
 다시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미움이 쌓여 방문을 걸어 잠근 것 같아.
 내가 제일 아끼던 슈퍼맨을 망가뜨린 게 미웠거든.
 그렇게 차츰차츰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쌓아가다가
 새벽녘, 일기를 하나 썼었어.
 부러 당신 보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펼쳐 뒀었지.
 아침이 돼서 그걸 내 방을 찾은 당신의 말,
 그때 눈을 가늘게 뜨고 자는 척하던 내 등 뒤로 당신이 뱉었던 말이 아직도 꿈에 가끔 나와.

 깊은 후회는 이미  색이 많이 바랬어.
 미움도 증오도 잔재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야.


 2012. 07.01 (47)


 이 방은 너무 어둡고, 스산해.
 내가 걸어 잠근 문이었지만, 열릴 생각도 않네.
 나갈 방법을 알아가는 중이야.
 이 방에서 나가게 된다면, 그땐 뭐든 용서한다고 안아 줄래? 부탁이야.





# 27


열이 많아 여름을 힘들어했던 내게, 여름을 좋아하는 말미를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차하러 갈 때면 엄마와 언니 몰래 둘이서만 먹던 팥빙수 맛이 어떤 건지

땀으로 적신 심부름의 달콤한 대가를 유일한 낙으로 선물해 준 사람이었어.

내가 태어날 때

당신이 내게 쓴 세로로 정성껏 적어 내려 간 편지를 읽으면서

딸로 태어난 내게 조금 아쉬웠던 것 같아.
모든 일상을 함께 하기엔 딸보단 아들이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던 걸까.
그럼에도, 당신 덕분에 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지.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목욕탕에서 등 밀어주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반항이랍시고 집에서 목욕을 하는 당신에게
잔소리하며 등을 밀어줄 수 있는 흔치 않은 딸내미가 될 수 있어서 굉장히 행복했어.

투병하는 동안 언니에게도 주지 않았던 당신의 소변통을 내가 직접 챙길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신이 날 편히 생각하고 의지했다는 거겠지.


아직 내 키가 130cm 언저리도 안 됐을 당시

 당신이 현장에서 갖고 온 내 몸집만 한 바퀴의 자전거를 선물해 준 덕분에

 난 악바리로 자전거를 어려움 없이 배울 수 있었고.
 고등학교 진학을 먼 학교로 배정받아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통학하던 당시

 친구들과 다른 게 싫어 자전거가 필요하다던 내게

 내 무릎께까지 오던 바퀴의 자전거를 선물해 준 덕분에

 친구들과 어렵지 않게 어울리며 학교까지 등하교를 할 수 있었어.


어릴 때, 주말 아침이면 항상 팔다리를 털어 주며 스트레칭하고,

기지개까지 펴 주며 놀리듯 잠을 깨워 준 덕분에 주말 아침이 항상 행복했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네.

 당신이 자동차를 좋아했기에 어린 나 또한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 차종을 꿰려고 안달이었지.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잠시나마 운전석이 앉히고 핸들에서 발 떼 보라며 봐주던 초등학생 때가

 당신이 가르쳐 준 처음이자 마지막 운전일 줄이야.
 스무 살이 되자마자 면허 따기로 했던 약속은

 이제는 비어 버린 당신의 자리

 당신의 부재에도 별 어려움 없이 지킬 수 있었고.

 항상 요 앞 슈퍼를 갈 때도 날 끼고 데리고 다녔던 통에
 시원한 가을밤산책을 하면서

 당신이 장난스럽게 손에 깍지를 끼고 힘줄 때마다 아팠던 게 기억이 나.
 난 당신을 이겨먹겠다고 아등바등이었지.
 그렇게 세상을 무던히 살아가는 악력이 생겼고,
 하다못해 고2 체력검사 때 악력이 좋게 나온 것도 당신 덕분인 것 같아 속으로 고마워했어.


 어릴 땐 당신을 닮았다고 하는 말이 너무 싫었어.
 당신의 모두에게 마냥 사람 좋은 멍청함,

 약간의 대책 없는 철없는 부분들

 좋게 말하면 당신만의 처세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들.
 다 내가 타고난 것 같았거든.
 부정했음에도 피부색은 엄마를 닮아 환했지만 피부결은 당신이랑 같았고.
 엄마를 닮아 손이 길었음에도 새끼손가락이 안쪽으로 휘어져있는 건

 당신 손과 꼭 닮았다고 엄마가 얘기해 주더라.





그렇게 행복했던 기억들이 어디로 온데간데 사라졌다가 이제야 찾아온 건지.
 있을 때 잘하라는 말 나처럼 뼈저리게 느꼈던 열일곱 또 누가 있나 나와 보라고 그래.

 당신을 잊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태어난 날을 내 주변 곳곳에 숫자로 남겨 매번 조우해.


 그래도 고마워.
 다른 사람에겐 엄격했어도, 우리에겐 다정히 대해 줘서.
 아파서 힘든 와중에도 짜증 많이 안 내려고 노력해 줘서.
 암이 온몸에 퍼져 다리를 잘 쓸 수 없었음에도

 팥빙수를 사 주던 때처럼 나만 데리고 가

 내 인생의 첫 선짓국을 먹어 볼 수 있게 해 줘서.
 간병인을 안 쓴 덕분에 엄마가 고생했지만

 방학 때 학교에서 자습할 시간을 당신과 땡땡이치듯 같이 시간 많이 보낼 수 있게 해 줘서.
 당신의 부재로부터 하루빨리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라고

 3개월 시한부 선고에도 1년 넘게 잘 버티다 개학식 전날 우리 곁을 떠나 준 거.

 당신이 떠나던 날

 우리랑 함께 우는 것처럼 눈물 한 방울 흘리며 떠나 줘서.
 그렇게 발인 후에 비가 돼서라도 우리랑 같이 펑펑 울어 줘서.
 그래서 너무 고마워.
 당신은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하려고 했었네.
 난 사실 나이 든 당신의 모습이 멋질 것 같아서 내심 많이 기대했었는데.
 그 흔한 독사진이 없어서 흐릿한 잔상처럼 남은 영정사진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많이 남아.

 거긴 어때, 아빠.
 아프지 않고 편안해?
 아픔 잊고 산 지 10년 정도 됐으니까 이젠 내 꿈에도 한 번쯤 나와 줘.
 아빠랑 너무 닮아 살아가는 내내 당신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둘째한테 더 자주 마음 써 줘야지.
 보고 싶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못해 준 거 미안했어.
 기회가 생기면 얼굴 보고 말해 줄게.
 다음 생엔 더 오래 곁에 있어 주라,
 아, 그때는 이번 생에 다하지 못했던 아빠의 소임 끝까지 완수해 주고.
 다음 여름에 아빠를 찾아갈 땐 아빠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운전대 잡은 모습으로
 녹지 않게 팥빙수 하나 사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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