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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부인과 추쌤 Apr 17. 2018

남자 산부인과 의사 이야기

레지던트 이야기 #2

개인적인 느낌을 담아서 쓴 글이라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키운건 8할이 '라면'이었다.

전자렌지로 3분만에 완성한 3분 라면


말에 아내가 딸과 시름을 하며 밥을 먹이고 있을 때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선택한 메뉴는 바로 '라면'이었다. 아이의 보챔을 달래는 아내에게 맛난 음식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마땅한 실력이 없는 나는 '전공의 시절'에 많이 먹던 라면을 해주기로 결심하였다.

라면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먹을 수 있지만, 분만장을 지키던 전공의에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컵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분만장에 진통중이던 산모가 있거나, 아기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식사 때를 놓쳤고 결국엔 라면으로 해결하는 일이 정말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말기 난소암 수술에 보조의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날이면 밥 때를 놓치는 일도 너무 많았다. 그 날 첫끼로 먹는 나의 저녁 식사는 늦은 밤 컵라면 2개였다. 학생시절 삼시세끼 챙겨먹던 삼식이였던 내가 인턴/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식사가 불규칙해졌고, 이러한 불규칙한 식사는 나를 무럭무럭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체중은 1년동안 무려 15kg나 늘어나버렸다.

요즘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분만장에서 요리를 시켜먹고, 라면을 해먹고, 식사를 해결한다고 하면 뭇매를 맞을 것만 같은 느낌이지만, 제가 전공의일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끼니를 놓치면 다음 끼니도 보장할 수 없는 그러한 근무 속에 저의 라면 한끼는 매우 매우 중요했습니다. ㅠ_ㅠ


라면의 조리법은 간단하다.

전공의 생활을 하며 컵라면에 지긋지긋해진 나에게 '분만장 간호사'가 새로운 조리법을 알려주었다. 그 조리법은 요리를 전혀 모르는 나에게도 어려움이 전혀 없었고 매우 간단하고 걸리는 시간도 매우 짧았다.

봉지를 그릇에 넣고 물을 400 cc 정도 붓고 전자렌지에 3분 돌리면 되는 것이었다. 정말 3분밖에 걸리지 않는 3분 요리였다. 병원에는 사실 직원을 위한 식당이 있다. 전공의 저년차 시절에는 왜 그리 시간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간이 없었다기 보다는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분만장을 나가서 먹을 시간이 생겼다하더라도, 지친 몸을 이끌고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기 귀찮을때도 많았다. 그리고 내가 식당을 가기위해 사용해야하는 5분, 돌아오는 5분, 밥을 먹기위해 기다리는 5분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15분의 시간을 3분과 바꿀 수 있다면 충분히 나에게는 가치있는 일이었다.


새벽에 먹는 컵라면은 정말 맛있다.

운이 좋아 저녁식사를 챙겨먹은 날에는 몸과 마음이 든든했었다. 하지만 그 포만감은 새벽 1-2시가 되면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응급수술 혹은 분만을 마치고 '뜨거운 물'로 라면을 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면이 다 익기도 전에 꼬들꼬들한 라면을 먹으면서 수술기록 혹은 분만기록을 작성하였고, 오더를 넣었다. 야밤에 먹던 따뜻하고 짠 국물만이 긴장으로 인해 지친 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국물을 다 마시고 먹는 콜라 한잔은 천국의 맛이었다...


전공의 당시의 일기

- 오늘은 매우 졸리고 피곤하다.... 2013-02-20
- 또 힘들다 ㅋㅋㅋ 나만 힘든거 같은건 착각이겠지??? 2013-03-20
- 일을 정말 천천히 하면 끝이 없는 것 같다. 하루종일 일을 붙잡고 있어도 결국엔 다 못했다. 큭. ㅠ 2013-05-27
- 전날 불꽃 같은 당직을 마치고 잠이 들어버렸다. 2014-06-30
- ICU당직은 쫄깃쫄깃...BP는 계속 떨어지고... 날 너무 힘들게 한다... 어떻게 해줄방법이 없다. CRRT를 돌리지만 감당이 안된다... 2014-11-11
-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너무 무섭고 떨린다.... 2014-12-10 


그래도 요즘은...

예전에 아는 형님이 "너 어제 당직이었으면 오늘 퇴근하겠네?"라고 나에게 카톡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네?! 아뇨 오늘도 당직이에요."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음?!!"이라고 놀라는 형에게 물어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밤을 새는 야간 당직을 하면 다음 날 퇴근을 한다."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야간 당직은 '밤을 꼴딱 새우고 다음날 정규 근무 끝나고 퇴근하는 최소 36시간, 최대 48시간의 근무'였는데, 그게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번의 충격을 받았었다. (사실 심한 경우에는 2일씩 연속 당직을 서서 24+24+12 : 60시간 연속 근무하는 날도 있었다.)


전공의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근무여건이 아아아아주 쪼끔!! 좋아진 것 같다. Mediteam 팀 회식에서 전공의 주 80시간 근무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래도 다른 직종도 주 80시간씩 이상씩 일하고 그러지 않나요? 다들 야근하고 밤 늦게 까지 고생하던데요..."라는 말에 다른 직업군의 팀원이 반문했다. "어디서요?"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나도 잘 모르겠더라...

일이 유난히 느리던 나는 일주일에 140시간씩 병원에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더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입던 외투를 입고 4월에 벚꽃을 보면서 집에 돌아갔었으니...

오늘도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며 병원을 지키고 있는 밤을 새고 있는 전공의들과 전임의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MBC 하얀거탑 中 "장준혁 : 죽은 사람은 못 먹는 거야. 감사하게 먹어~"

문득 주말에 아내와 함께 밥을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라면을 먹기로 결심하면서 떠오른 내용을 쭉 써보았습니다. 레지던트의 삶을 재미있게 극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네요 ^^;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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