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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Oct 18. 2021

외로움을 값으로, 그 일생의 사랑

'기술복제시대,' '아우라,' '영화 예술'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친근하게 만들어준 이론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해 쓴 사람.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유명한 예술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오래가는 것만큼 그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벤야민은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독일인이었다. 이후 독일의 경제 상황과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궁핍을 경험했으나,  이전부터 아버지와의 불화 등으로 인해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특히 그의 삶의 말미에는 가난과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


독일의 상황이 유태인에게 적대적이게 되자 벤야민은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거주하던 시절, 벤야민은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돈을 벌지 못했다. 그가 벌어들이는 원고료 자체가 일정하지가 않았고, 유태계 클럽 같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돈도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그 일정치 않은 돈마저 오래 받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갑작스레 그는 자신이 기고하던 지면에 글을 싣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의 벗이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어찌저찌 벤야민이 글을 싣도록 도와주지만, 그 돈은 비정기적이었을뿐만 아니라 최저 생활비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벤야민은 전처인 도라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얹혀 살기도 하고, 얼마 간은 교외의 지역에서 머물고, 다시 얼마간은 파리에 머무는 식으로 살았다.


그 당시 그가 쓴 편지를 통해 그의 비참한 생활수준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쇠약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비참한 처지를 인식할 만한 힘은 남아 있지만, 그 처지를 극복할 힘은 전혀 남아 있지 않네.”


유럽의 분위기가 심상치않게 돌아갔고, 파리에 머무는 것도 위험하게 느껴지자 벤야민은 미국으로의 이주를 진지하게 고려하지만 실패한다. 이때가 1939년이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여느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갇힌다. 그는 어떻든 적국의 국민이었다.


벤야민은 파리 친구들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석방된다. 석방 후, 파리에 체류하는 것이 위험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곳에 계속 머무른다. 이후 벤야민의 행보를 보면 우선은 파리에서 정말 계속 머무를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파리 박물관 출입증을 연장하고(1940), 아도르노에게 진행 중이던 보들레르 연구를 일단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물론 벤야민은 자신의 결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으로 망명할 길을 열어 두고자 호르크하이머에게 미국 비자를 요구한다.  미국 비자는, 우리가 보는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으레 그렇듯, 너무 늦게 발급된다.


물론 비자가 조금 더 일찍 발급되었다고 한들 이야기가 크게 달라졌을지,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아무튼 너무 늦게 발급된다. 그 비자는, 독일이 결국 프랑스를 침공한 1940년 8월에서야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벤야민은 여동생과 함께 마르세유 지역으로 피난한 상황이었다.


벤야민이 파리를 곧바로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그건 미국 비자가 당장 발급되지 못했던 , 곧바로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이주해  만한 돈이 없었던 것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 때문이기도 다. 그러나 또한 벤야민에게 파리가 중요한 곳이어서이기도 했다.


그에게 파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그의 작업 때문이었다. 연구와 글쓰기가 업이었던 벤야민에게 파리는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는 ,  풍요로운 자원의 장소였다.


그의 삶에서 글쓰기, 그러니까 그의 일은 정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삶에서 혼자가 될수록, 고독해 질수록, 더욱더 일에 매달렸다. 일에 매진했다.  자신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벤야민이 그리  생애를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의 후반부를 보면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로맨스는 이유야 어떻든 모두 끝장이  버린 상태였다. 전처와 헤어지고, 그가 가졌던 다른 에로스적 로맨스끝났다. 그리고 그는 삶에서 다른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 어떤 에로스적인 향연을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했던 여자, 아샤와의 사랑이 끝나버린 것을 깨달은 이후 벤야민에게 남은 사랑은 오직 텍스트에 대한 것이었다. 벤야민은 말한다. "어쨌든 에로스에 의해 규정되는 일이 점점 없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시기는 지난 시기와 구별된다”고. 또 파리의 수용소에서 벤야민은 적었다. 그 날은 그가 글자를 읽는 것과 몹시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 동일한 일임을 직관적으로 경험한 날이었고, 그것을 꿈꾼 날이었다. "이 꿈을 꾼 뒤 나는 몇 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행복에 겨워서."


이제 그의 삶에서 남은 의미 있는 일, 그가 사랑하는 일은 그의 일, 그의 텍스트, 그것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차마 쉬이 저버릴 수 없었다.


뒤늦게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향했을때 상황은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때였다.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한다. 미국 비자는 나왔지만 프랑스를 출국할 수 있는 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 9월 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밤에 포르-부(Port-Bou)에서 자신의 생을 끝낸다. 많은 양의 모르핀으로.





텍스트 외에, 그의 일 외에, 파리의 박물관 외에 그로 하여금 살아가게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이 온 몸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든, 그 자신을 그렇게 지켜주는 사람이든. 그가 텍스트를 몹시 사랑했다고 한들 그가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어서다.


그러나 말이지, 그가 일에 집착하고 집착했던 것은 그것 만이 삶에 남은 유일한 것이어서 이기도 했겠지만, 그가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또 한편, 이 생각 역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외로웠지만 행복했을 것이고, 행복했으나 외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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