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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Oct 19. 2021

전쟁과 사랑이 맞닿은 자리

김수영. 우리는 이 시인을 독재에 항거한 시인으로 많이 회자한다. 그러나 또 이 시인은 한국전쟁을,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던 전후 세대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삶과 사랑은 6·25와 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시인의 삶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전반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전반의 시기를 보면 또 시인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시인이 겪어야 했던 전쟁의 고통과 그래서 잃어버린 로맨스를, 그러나 평생 함께한 몹시 사실적인 로맨스를 엿보게 된다.



1950년 4월, 시인은 돈암동에서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살았다. 그들은 연애 결혼을 한 경우였는데, 아내 김현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신혼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때도 그러했고 그 이후에도 평생 직장다운 직장을 꾸준히 다니고 구해본 적이 없었던 김수영은 김현경의 임신 사실을 알고서 구직 활동을 했고, 실제로 시간강사 자리도 얻는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신혼은 북한의 남침과 맞물려 뒤얽힌다. 6월에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 직장 역시 얼마나 다녔는지, 그들의 신혼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전쟁이 터졌을 때 부부는 피난을 가지 않았다. 김수영의 집안 자체가 피난을 가지 않았고, 한강교를 건너는 무리에 합류하지 않았다. 정부가 뿌리는 호외들,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 중이라는 그 보도들을 믿어서였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도와주러 오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군 트럭은 위장한 채 후퇴하고 있었고, 북한의 전투기는 서울의 상공을 돌고 있었다. 시민들은 위기를 감지했고 모두 한강교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왜 김수영은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민의 행렬에 합류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김수영의 어머니는 그때 아마 처음으로, 장남이 되어서 이 지경에도 가족들을 책임지지 못한다고 속풀이를 했다. 장남이었지만 그로서는 어머니가 강하다고, 이런 결정은 어머니의 몫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는 도망가고 싶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그와 가족들은 서울에 남아 있었고 이후 시인은 문학동맹에, 그리고 결국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후 김수영은 가족들의 생사는 물론 아내의 생사도,  아이의 생사도 모른  고난의 행군을 겪는다.  시절에 대해 그가 남긴 기록은 극히 적어 없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그는 의용군으로 끌려가 북으로 전진했고, 개천연병장에서 모진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사태가 전환된 것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덕분이었다. 문인들로 구성된 의용군은 북한의 주력부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혼란 속에서 남하했고, 김수영의 경우 의용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순천 어딘가에서 탈영했다.


어렵사리 돌아온 서울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는 빨갱이 새끼에 불과했다. 자신의 집이 이 옆이라고 해도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구타를 당하고, 다리가 피범벅이 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갇힌 채 몇 날을 보낸다. 김수영은 이 시절에 대해서 역시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제대로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나오게 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는 미군의 손에 이끌려 거제 포로 수용소로 갔다. 그리고 그 끔찍한 포로 수용소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포로 수용소의 경험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이 때도 그가 영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유효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그는 포로 수용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야전 병원 근무를 맡게 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왔을 때, 시인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았던 것 같다.


그는 술을 마셨고, 술을 마셨고, 술을 마셨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수용소의 경험이나 의용군의 경험에 대해 뭔가 써보라는 주변의 조언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기에 정신적인 충격을, 강한 일격을 더한 것은 아마도, 아내 김현경의 일일 것이다. 자신의 아내는 자신의 벗, 이종구와 부산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그래.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용군으로 끌려간 남편을 막무가내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만한 여자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 김현경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김수영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이지, 왜 하필이면 이종구인가. 그는 자신이 동경에 있던 시절 한 방에서 살았던 친우였다. 그러나 또 보면, 그는 김현경에게 늘 관심이 많았다. 늘 김현경의 주위에 있었던 이였다. 어쩌면 이종구의 입장에서는 내가 김현경을 앗아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김수영이 이에 관해 어떤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말이지, 몹시 괴롭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결국 김현경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날, 그 방에 김현경와 이종구는 함께 있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김수영은 자신의 벗에게 말했다. 그리고서 ‘가자.’ 김현경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러나 김현경은 일어서지 않았다. 갈 수 없다고 했다.


김수영은 그 곳에서 나왔고, 술을 마셨고, 1953년 10월, 서울에 돌아왔다.


홀로 돌아온 서울에서 김수영은 계속 술을 마셨다. 주간 잡지사에 취직했으나 그 곳에서 일하는 동안 김수영은 집안에서 폭군처럼 행동했다. 동생 수명은 오빠가 악마 같았다고 말한다. 그 잡지는 김수영 눈에 협잡꾼들이 모인 곳이었다. 김수영은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으며 잡지사는 서너달 다니고 그만뒀다. 어머니에게 차 값과 담뱃값을 빌릴 수는 없으니 외국신문이나 잡지들을 뒤져 번역거리를 구해 원고료를 벌었다. 그걸로 먹고 살았고 평화 신문 문화부에 취직했다가 다시 그만두고. 그런 생활이었다.


그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무엇이든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시절에, 아니 보다 정확히는 김현경 없이 혼자 서울에 돌아와서 김수영은 「너를 잃고」를 썼다. 이것은 아마 김수영이 쓴 유일한, 아주 직접적인 연애시일 것이다.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히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인 까닭에


「너를 잃고」, 1953년.




그리고 54년 말 혹은 55년 초였다. 김현경이 김수영에게 돌아왔다. 김수영은 그때까지 혼자였고, 김현경과 재결합한다.


둘은 재결합하고 성북동에 살림을 꾸리지만, 그들은 이전 같을 수 없었다. 둘의 사이는 몹시 복잡했다. 그것은 김수영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인 듯하다.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경은 김수영의 삶에서 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현경은 시인의 시를 정서했고, 시인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가정의 생활에 큰 역할을 했다. 김수영이 48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가장 먼저 병원으로 달려갔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에 관해 쓰고, 그의 죽음을 기린 것도 김현경이었다.


전쟁과 전쟁의 기억, 사랑과 사랑의 배반 아닌 배반, 이 모든 것이 뒤엉킨 삶이었다. 정부는 국민을 배반했고, 또 배반했다. 김수영은 그 사이에서 살았고, 그 사이에서 괴로워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고자 했던 시인이었다. 온 몸으로 썼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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