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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Oct 24. 2021

'나는 메달이 아니다'의 삶


요즘에는 많이 읽히지 않는 듯 하지만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한 명인 막심 고리끼는 1868년,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이름 막심 고리끼는 필명으로, 본명은 알렉셰였다.


이후 소설을 쓰는, 그것도 많은 소설을 쓰는, 이 작가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그보다 더 전에 잃었다. 그 때문에 이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는데, 그 생활도 길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어린 소년이던 고리끼에게 말했다. ‘나는 메달이 아니다.’


즉 자신은 메달이 아니라서 어린 아이를 목에 걸어 둘 수 없다, 나가서 네 알아서 살 길을 찾아 살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이른 나이부터, 아니 너무 어린 나이에 제 밥벌이를 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기실 안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신발 만드는 공장, 빵공장, 철도공장에서 일해봤고, 여객선에서 접시 닦아봤고, 어부 일도 해봤고, 이후 지역의 신문 기자로도 일했다.


몹시 어린 나이에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아이는 힘든 와중에 책을 읽었다. 이걸 두고 힘든 와중에도 책을 읽었다고 해야할지, 힘들었으니 책을 읽었다고 해야할지 말하기가  어렵다.


고된 노동은 그를 육체적으로 힘들게 했을 것이나,   고된 세상에서 독서는 일종의 도피처였을 이기 때문이다.  속의 세상이 아니라면  어린 아이가 고된 일상에서 도저히 쉴 틈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에 러시아의  겨울, 야간 숙소의 난로 곁에서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혼자  읽기를 좋아한 아이였다.


그리고  학교에 가고 싶어 했고, 언젠가 대학에 가리라 생각한 아이였. 그는 비교적 대도시인 카잔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다녔고 부두 노동자들과 방랑자들 사이에서 섞여 살았다.  닥치는 대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깨닫게 된다. 그가 대학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언제부터 자랐는지 모를  내면의 오기구체화된다.


그는 자신의 생활조건이 나빠질수록, 삶이 힘들어질수록 그 자신은 더 강하고 더 영리해지고 있다고, 그렇게 느낀다고 썼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 속에서 발견한 온갖 고통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조소와 적대가 마음에 든다고 썼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온갖 고통, 세상에 대한 조소, 적대감이 그 아이를 무엇으로 이끌었을까. 결국 절망이었을까. 19살의 나이에 청년이 된 아이는 전재산을 털어 권총을 산다. 그리고 가슴을 겨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권총은 심장을 비껴가 폐를 맞춘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는다.


살아 남았으니 살아야 했다. 요양하고 제대로 치료받을 처지가 아니었음은 당연하니까. 그는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제과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그의 운명을 바꾼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리얼리즘 문학을 쓰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고, 또 혁명에 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이제 청년이 된 고리끼는 좋은 책을 읽었고, 공부할 시간을 얻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 혁명가로 자라났다. 이후 작가가 된 고리끼는 러시아 문학을 인민 해방의 주요한 수단으로 택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어떠했다고 말해야  지는 모르겠다. 고리끼가 살았던 러시아는 요동치는 시기였다. 1905,  무렵 러시아는 내부적인 문제로 곪아있는 와중이었고,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전하는 시기였고, 그에 뒤따르는 문젯거리들을 껴안고 있는 때였다. 대도시에서는 파업이 종종 일어났다.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혁명 이념이 이곳 저곳 스며들었고 전파됐다.


이와중에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 또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특히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차르 체제에 대한 비난에 불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1905년의 러시아 1차 혁명 시기, 고리끼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이후 그의 문학 작품과 활동에 계속해서 반영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어머니』 역시 1차 혁명 이후 외국 망명 중이었던 고리끼가 급하게 구상하고 집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혁명은 그의 생각과 달랐던  같다. 『어머니』를 두고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이라고 말했던 레닌과 고리끼의 사이는  많이 틀어졌다. 1917 혁명 이후 고리끼는 분노했다.


그는 무엇에 분노했는가. 인민들의 야만적인 살육 행위, 지식인들을 반동분자로 부르며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에 분노했다. 그는 그런 짓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그리고 당이,  지도부가  야만적인 행위들을 모두 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 짓은 그만두라고 소리질렀다.


그의 눈에 혁명이 뒤 사회는 반동분자라는 이름을 붙인 채로 너무 많은 지식인들을 죽였다. 반동적이라는 딱지 아래 너무 많은 문화 유산을 파괴했다. 그는 1916 가을부터  5  본격적인 작품은 집필하지 못한  평론과 탄원서만을 썼다.


이에 대한 소연방의 대답은 나라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의 만성적인 지병이었던 폐병을 치료하고 오라고, 해외에서 요양을 하고 오라는 이유였다. 1921 가을, 작가는 소연방을 떠난다.


이후 그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으로 돌아가지만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그가 만족할 만한 사회를 보았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도 가늠할  없다. 그는 말년에 스탈린체제를 옹호하는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그가 사회의 면모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늙어갔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의 죽음 또한 그리 순탄했을  같지는 않다. 그는 지병으로 앓았던 폐병으로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트로츠키 파의 소행이라는 ,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 여러가지 말이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작가의 고향, 작가가 일했던 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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