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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Jul 01. 2022

"그 사람 그냥 정신병자야"

처칠의 아버지는 그렇게 불렸다

훗날 영국을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만드는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그의 아버지 아닐까?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당시 사람들에 의해 흔히 미친놈이라고 불렸고, 빅토리아 여왕은 "그 사람 그냥 정신병자야"라고 말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랜돌프 처칠 경(Lord Randolph Churchill)은 이후 지긋하게 나이 든, 그러니까 경륜이 있는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정신병자"라고 평가된, 진정 무모하고 쉽게 발끈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경탄하면서 정신 나갔다고 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악의를 가지고 그를 향해 정신 나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랜돌프 처칠 경은 마흔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정신착란의 상태로 죽었다.




윈스턴의 출생

그는 빛나는 성적표를 손에 쥐고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귀족 가문 출신의 엘리트. 그는 졸업 후에 프랑스에 가서 놀면서 하원이 해체되길 기다렸는데, 하원이 해제되면 곧장 출마해서 정계에 입문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에서 미국인 여성을 만났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섞인 활달한 여성, 그녀의 이름은? 제니 제롬(Jennie Jerome)이었다. 


둘은 만난 지 48시간만에 약혼(!)했다. 그리고 반년 뒤, 파리의 영국 대사관 호적 사무소에 혼인 신고를 했다! 진정 빠른 전개 아닌가.


그로부터 또 일곱달 뒤, 둘 사이에서 첫 아들이 태어났다. 첫 아들의 출생 일화에서 제니 제롬의 성격을 알 수 있는데, 임신 말기에 제니는 블레넘(Blenheim) 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굳이 굳이 만삭의 몸으로 참석을 했다.


그런데 당시 제니는 진짜 만삭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진통이 온 것이다. 진통을 느끼자 곧장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제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 블레넘 궁의 복도는 엄청나게 길었다. 자신의 침실까지 가지 못한 제니는 의상실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불도저 랜돌프

첫 아들을 얻고 나서 1년 반이 지났을 때였다. 런던의 귀족 사회에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당시 웨일스 왕자(후일 왕,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사람이다)와 랜돌프 경의 형을 중심으로 한 스캔들이었다.  


사건은 이렇다. 이미 결혼한 고위 귀족 여성이 한 명 있었다. 그 여성은 웨일스 왕자와 연애를 했다. 그 이후에는 랜돌프 경의 형과 연애를 했다. 


이 사실을 알고서 왕자는 화가 났다. 그리고 갑자기 도덕의 살아있는 옹호자가 됐다. 그가 주장하기를, "랜돌프 경의 형과 해당 여성은 각자 이혼하고 둘이 재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격이 불도저인 랜돌프 경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당연히 형의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의 왕자에게 협박을 한다. 


"이런 식으로 이혼 소송이 생기면 웨일스 왕자가 (해당 여성이 이전에 사랑을 속삭이며) 쓴 연애 편지들이 전 사교계와 뉴스에 다 발각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말이다. 영국 사교계가 아주 시끄러웠다.


열받은 웨일스 왕자는 랜돌프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랜돌프 경이 이 결투를 덥썩 받을 수는 없었으니, 웨일스 왕자는 미래의 군주가 아닌가? 그래서 미래의 군주에게 무기를 들 수는 없으니 대리인을 지정하라고 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자 쪽에서는 "처칠 일가를 받아들이는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엄포를 둔다. 처칠 일가는 영국 사교계에서 완전히 고립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상황을 중재한 것은 당시 지혜로운, 이미 노인이 된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총리였다. 


디즈레일리는 (랜돌프와 그 형의 아버지인) 말버러 공작에게 아일랜드 총독 자리를 맡아서 잠깐 다녀 오라고, 멀리 가 있으라고 권한다. 물론 저 온갖 말썽과 사고를 치고 있는 저 아들놈을 비서로 데리고 말이다. 


총독직에는 어마무시한 비용이 든다. 공작은 이 일을 권유 받았던 적이 있는데, 비용 문제로 거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작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로써 처칠 일가는 일종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되며, 훗날 영국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을 하게 되는 처칠의 어린 시절은 아일랜드에서 시작된다. 



아일랜드 시절이 랜돌프 경에게 결코 무익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곳에서 정치적인 감각을 배웠다. 


그는 서른살의 나이에 다시 런던에 돌아왔고 하원에서 제자리를 찾았는데, 이때 그는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라는 구상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1879년이었다. 


그가 가져온 "토리 민주주의"는 이제 더 이상 특권 계층,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당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의 이권을 가져오는 영국식 보수주의라는 구상이었다. 


광부,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두 투표권을 가지게 된 세상, 공장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세상에서 보수당이 표를 가져갈 수 있는 세상. 세간이 말하는 정신 나간 랜돌프 처칠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랬다! 


그들에게 투표권을 준 것은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이었으나 랜돌프 처칠은 자유주의란 중산층 운동임을 직관적으로 꿰뚫어 보았다. 저들은 토리당의 투표자가 될 수 있었다. 


랜돌프 처칠은 보수당을 다시 집권당으로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자신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동시에 가장 미움 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예리하고, 재치가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고개를 젓는 이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노골적인 경멸감을 드러냈다. 




자신이 없어선 안 될 사람이었던 시기에 랜돌프 처칠이 협상테이블에서 써먹은 방식은 "이거 안되면 나 사퇴할거야!" 였다. 돌연 그가 갑작스레 사퇴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왜냐면 그는 언제나처럼 "나 사퇴할거야!"라고 카드를 던졌는데, 어느날은 "그래 너 사퇴해!" 라는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이었으니까. 


사건은 이랬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국방장관과 군사 예산을 두고 다툼을 했다. 재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예산을 두고 싸우는 건 몹시 흔한 일이다. 그런데 랜돌프 경은 이런 다툼을 장기적으로, 끈기있게 끌고 가는 걸 잘 못했다. 그는 또다시 자신이 쓰는 방법, '사퇴하겠다'를 들먹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퇴해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존심 강한 랜돌프가 자신의 말을 물렀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는 여왕을 알현하고 윈저성에서 곧장 사퇴 청원서를 썼다. 심지어 여왕의 편지지에 썼다. (여왕은 이걸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그리고서 곧장 손수 <타임스>의 편집부로 자신의 사퇴 소식을 가지고 갔고,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며 아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이 이후로 랜돌프의 인생에 더 이상의 상승은 없다. 세계를 여행했으나 지루했고, 많은 돈을 받았고 신문 기사를 썼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으며, 정치적 복귀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끝난 정치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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