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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Oct 07. 2021

자살을 시도한 소설가

신학생이었던 헤르만 헤세는 초기 신학생 시절은 행복하고 모범적으로 보냈다. 그가 돌연 학교에서 ‘가출’을 감행하고 방황을 시작하기까지 그는 집에 매일같이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학교 생활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담고 있었다. 헤세의 방황은 어떤 외부적 요인이랄 것 없이, 특정한 이유나 동기랄 것 없이, 엄밀히 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할 원인이 보이지 없는 채로 급작스레 시작됐다.



헤세는 가진 것 없이 무작정 학교를 떠나 무려 23시간 동안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 헤센 지방(주도: 비스바덴)을 두루 방황했다. 그 당시 날씨는 영하 7도에 육박했고 그 날씨에 헤세는 드넓은 벌판에서 서성였던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은 그냥 걸어다녔다.



학교의 선생님들이 그를 이해해준 덕분에 헤세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는데, 그 처분이란 8시간 동안 물과 빵만 받은 채 감금되는 것이었다. 이 시간이 그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어느 정도로 미쳤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그 이후 계속해서 몹시 괴로운 시간을 보냈음은 분명하다. 헤세는 이어지는 부활절 방학 기간을 고향 칼브에서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그의 정신적 위기 상태는 지속됐고 교육은 중단되어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헤세의 아버지는 1892년 5월,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헤세는 학교를 휴학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가 신학교를 탈출했던 순간부터 헤세 속의 ‘영혼의 갈등’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가 겪은 내면의 갈등은 신경의 위기로 드러났다.



헤세는 휴학한 신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당시 학교를 떠나야 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학교를 떠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1892년 5월에 헤세는 본인의 집안과 절친한 사이였던 신학자 크리스토프 브룸하르트에게로 갔는데, 그는 헤세 아버지의 후계자였다. 당시 귀신 추방자로 유명했고 기도치료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헤세를 치료할 수도, 교육시킬 수도 없었다. 헤세는 그 곳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브룸하르트는 양친에게 헤세를 데리고 가라고 통보한다.



그 후 헤세는 슈테텐 학교에 가서 정원일을 하고 정신이 박약한 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는다. 겉보기에 헤세는 이 시기 동안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1892년 10월, 헤세는 슈테텐을 떠나 바젤의 소년원에서 몇 주일을 보낸 뒤 11월 2일, 칸슈타트에 있는 가이거 선생의 기숙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곳의 김나지움에 다닌다. 거기서 가까스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김나지움을 다니기는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헤세는 신학교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생활의 실패를 겪는다. 그 시절 헤세는 맥주집을 돌아다녔고 빚을 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 기간 동안 그는 방탕했다. 그리고 감상주의적인 염세에 빠졌다. 그러면서 곧잘 도덕적으로 후회감에 젖었다. 그 사이를 떠돌고 그 사이에서 배회하고 흔들렸다. 그러나 또 그 시간 동안 헤세는 하이네, 고골리, 투르게네프, 아이헨도로프의 <방랑아> 등을 탐독했다.



그 시기가 헤세에게, 헤세의 괴로운 영혼에 평안을 줄 수 있었던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헤세에게 어떤 평화와 평안감도 주지 못했던 이 1년간의 생활은 ‘평화를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헤세가 헤세 자신으로 가는 길의 포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 기간은, 아주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또한 이 시기에 헤세는 카프 선생을 만났다. 이 사람은 헤세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교제한 젊은 선생이었다.



1893년 10월, 헤세는 에쓰링겐의 마이어 서점에서 도제수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흘만에 싫증이 나서 도망친다. 그리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곁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낸 뒤 그는 모두가 말리고 만류하지만 칼브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한다. 이때 일을 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술자’ 즉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1894년 6월부터 1895년 9월까지, 즉 일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헤세는 나사, 바이스, 선반에 서서 줄질을 하고 구멍을 뚫고 납땜 인두질을 했다. 종을 매다는 걸 돕고, 그것을 위해 교회 대들보를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이 시기에 비로소 그는 그 내면의 어떤 위기를 극복한다.



그 내면의 어떤 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무엇이라 쓰기 어렵고, 정의하기도 어렵다. 여하간 그는 그 변화에 대해 카프 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1895년 5월에 카프 박사에서 쓴 편지에서 헤세는 ‘분노와 증오와 자살의 생각에 대한 사악한 시대가 지나갔다’고, ‘이제야 비로소 나는 점차로 고요와 명랑성을 다시 찾았고 정신적으로 건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이 편지에서 헤세는 그 거친 질풍노도의 기간 동안 자신이 ‘문학적인 자아를 형성해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겪어온 모든 방황은 그 자신이 문학적인 일에 종사하는 과정이었다고, 자신이 그리도 고독했던 날들 동안 해왔던 모든 독서, 김나지움을 다니던 시절 그가 게걸스러울 정도로 탐독했던 활자들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습관의 축을 이루었다. 헤세는 평생 다독가로 살았고 산문 작가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방황하고 배회하는 사람들을 위한 활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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