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기의 맛
호시노 미치오, <여행하는 나무>, 갈라파고스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책을 참 빨리 읽었다. 책 빨리 읽는 것이 능력자의 지표인 것 같아서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래서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도 그까짓 것 하는 마음으로 빨리 읽은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었어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읽는 <맛지마 니까야>도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빨리 읽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더 빨리 읽고 싶다.
그러다 며칠 전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국어책 읽듯이 속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서 읽었다. 일상적인 단어와 평범한 표현으로 알래스카의 자연을 묘사한 것을 읽노라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몸속에 스며들어와서 마치 꿈속에서 알래스카에 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찌르레기가 익숙해서 찾아보니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여름 새라는데 알래스카에서도 산다고 한다. 얼마나 경이로운지. 빨리 읽었다면 100 퍼센트 지나쳤을 것이다. 유리창에 부딪쳐 쓰러진 검은 방울새가 안쓰러워 돌봐주다가도 새가 정신을 차리자 자연의 섭리에 맡기며 밖으로 내보내는 장면 역시 천천히 읽지 않았으면 진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서 한 문장 복기해본다.
“백양나무와 자작나무 이파리들이 노랗게 물들고, 툰드라에 펼쳐진 융단은 와인 색으로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번역을 잘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란색과 와인 색의 대비가 눈에 선하고, ‘젖어든다’는 표현이 융단과 너무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감은 아름다운 풍경에서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7년 전 뉴질랜드에서 데저트 하이웨이를 차로 지날 때 나무 한 그루 없이 붉은 땅, 노란 땅, 검은 땅이 번갈아 펼쳐지는 풍경이 얼마나 신비롭던지.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비워준다.
오늘 글은 이것으로 마치고 싶다.
“특별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던 오늘 하루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또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딱 지금 내 기분이다. 천천히 읽는 맛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