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콤플렉스 벗어나기
삶이란 뭘까? 나는 자주 나에게 묻는다. 살아야 하는, 살고 싶은 이유에 관하여.
그러나 그 질문에는 늘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고작,
내가 안타깝게도 눈을 떴고, 숨을 쉬고 있고, 하루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귀를 뚫었고, 20대 중반에는 타투를 했다. 내 스스로 나를 고통스럽게 할 용기가 없었으니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땐 그냥, 스트레스 풀기 위해 하는 행동 정도로만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정말로 그거 말곤 내가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느끼는 일이 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예스맨이었다. 애당초 거절을 잘하지 못했다. 남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은 일은 곧잘 내가 도맡아서 하기도 했었다. 나 하나 힘들면 해결될 걸 괜히 질질 끌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마 현재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남자친구와 박 터지게 싸우면서 우리는 서로 개성과 고집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존중하고 맞춰가기 위한 과정을 겪으며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살아온 세월이 제법 되니 무조건 남자친구의 영향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충 추측을 해보자면 그 시점부터인 듯하다.
그전까진 늘 주말엔 쉬고 싶었지만 약속이 있었고, 주일엔 교회에 가면 보통 8~9시에 집에 들어왔다. 봉사를 제외하고라도 예배가 끝나면 조모임, 모임원들과의 저녁 등의 스케줄이 늘 잡히기 때문에 거절을 할 줄 모르는 나는 늘 그 상황에 끌려만 다녔다. 내 시간이 중요한 나에게 그 시간들이 사라지니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나는 그렇게 점점 우울한 삶을 버티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 내가 우울증인 것 같다고 주변에 말하면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니가 무슨 우울증? 사는 건 원래 다 힘들어. 힘내. 우울증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인 사람은 이렇다더라는 기준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하하 호호 일상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삶에 내가 없는 것. 그게 내가 처음 느낌 우울감이었다. 남을 돌보느라 나를 미처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다. 그저 하루에 끌려 다녔을 뿐이었다.
내가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시간이 필요했고, 그럼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회와 단절한 삶을 살라는 의미는 단연코 아니다. 내가 충분히 쉬었다고 느꼈을 때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채워진다는 느낌이 드는 날도 더러 있었다. 남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속에서 힘들다고 외치는 나 자신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 참고 그 순간을 지나치면 후에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온다.
한 번 거절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다. 가끔은 왜 먼저 연락을 안 하냐고 서운해하는 친구들도 있고, 먼저 연락이 끊길 수도 있지만 혹 그렇게 되더라도 그들과의 인연이 거기까지인 것뿐이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다. 나와 평생 갈 인연은 '나'뿐이다. 나보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없다. 그러니 시작이 어려워도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거절은 오히려 어렵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도 있다. 세상에 나를 힘들 게 하는 일이 수백 가지는 되는데, 남을 챙기느라 나를 포기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