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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장장 May 17. 2022

리더십과 경영

아이팟과 보르도 TV 그리고 디자인경영

리더의 의사결정이 만드는 디자인 문화

남의 컨셉을 따라 하는 것에 익숙한 기업이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성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이 만든 상품을 따라 만들며 성장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기업의 컨셉을 따라 하며 성장했기에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서 성공해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창의적 결과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기존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도 최근에 이러한 변곡점을 지나온 역사를 갖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한국기업은 외국의 전시회 등 출장지에서 카탈로그를 가방 한가득 담아 오곤 했다. 가져온 카탈로그는 내년에 출시할 상품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될 보물창고처럼 여겼다. 품평회에서는 그것들을 베낀 듯 아닌 듯하게 제시한 디자인 안이 최종 양산 제품으로 선택됐다. 창의적인 디자인 안은 암묵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났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시대였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기업의 문화는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한국기업의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1류 기업 수준에 근접했고, 비싼 값을 주고 제품을 사는 소비자들은 남의 것과 유사한 것은 사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인의 창의성이 인정받는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선진기업의 카탈로그는 차별화 포인트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 그 쓰임이 바뀌었다. 


나에게 반도체는 기술인가? 디자인인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은 반도체로 대변되는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대한 운명적 선택을 강요받았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일으킨 소니, 애플, 삼성 세 기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반도체를 소니는 기술로 흥정했고, 삼성은 디자인으로 인식했고, 애플은 이미 디자인 강자였다. 이 당시 소니의 최고 경영자는 이데이 노부유키였고,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었고, 애플은 스티브 잡스였다. 세명의 리더가 반도체를 이해한 정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당시 소니는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과 퀄리아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으나, 실패했다. 이 전략에서 소니가 만든 메모리스틱은 소니 제품에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뽐내던 소니의 카메라, 오디오 등 제품의 명맥을 연장하는 전략에 머물렀고, 퀄리아 브랜드는 비싼 가격 때문에 소비자에게 외면받았다. 이에 반해, 플래쉬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이 앞서 있던 삼성과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하던 애플은 협력해서 아이팟이라는 MP3를 만들었다. 아이팟의 성공은 대체로 앱스토어를 통해서 음원을 공유하는 기능이라고 분석하고 있으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반도체 디자인을 했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설명하면, 한 예로 카세트테이프의 경우 듣고자 하는 음악을 찾을 때, 버튼을 누르고 있는 시간에 따라서 내가 찾는 음원의 위치로 이동하는데, 한 번에 찾지 못하고 몇 번을 눌러서 찾아야 하기에 불편했다. 그러나 MP3는 쉽고 정확하게 그 위치를 찾고 디스플레이에 표시도 해주는 등 친절하기까지 하다. 소니 등 대부분의 기업은 이러한 기술적 변화를 간과하고 버튼을 누르는 조작 방식을 고집했으나, 애플은 달랐다. 아이팟의 전면의 약 2/3 정도의 면적에 휠 방식의 큰 버튼을 만들고 그 휠을 돌리면, 음원의 이름이 바로 위 화면에 표시되게 디자인했다. 디지털 기술에 맞게 디자인된 애플의 힐은 MP3의 대명사가 되었고, 소니의 워크맨을 시장에서 사라지게 한 카운트 펀치로 작용했다. 세 기업의 운명은 이때 결정적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처음부터 기술 그 차제보다는, 디지털만의 감성을 담은 상품을 요구한 것이었다. 남이 만든 트렌드를 따라가는데 익숙한 문화를 가진 기업은 대체로 이 부분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되고, 시대의 흐름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기업의 리더들은 아직도 20세기의 카탈로그와 같은 선진기업의 흔적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필자가 쓰고자 하는 글의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다. 반도체의 개념은 이 순간에도 진화하고 있기에 반도체를 업으로 삼은 분들에게 “반도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토론하고 싶었다. 


5년 후, TV의 기준을 바꾼 삼성전자 

디지털 감성을 담는 일에 익숙한 직업이 디자이너이기에, 리더가 디자이너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된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디자이너의 정의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 교수가 「인공 과학의 이해」라는 책에 쓴 “기존 상황을 낫게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를 궁리하는 사람은 모두 디자이너다”이다. 이 정의를 통해서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한국의 문화와 디자인이 발달한 곳의 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의 디자인(창의성) 수준을 말할 때 그 기업이 보유한 디자인 조직 레벨과 인원 구성을 보면, 그 기업의 창의적 수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 즈음에 삼성은 디자인 조직을 디자인경영센터로 바꾸고, 차년도에 출시될 라인업 디자인 중심 업무에서 라인업-원형-차세대-미래 총 4개로 구분해서 사업의 비전과 연결하는 디자인 전략 체계를 갖추었다. 인문학과 공학을 전공한 인재가 디자인경영센터에 배치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1]


이 변화의 결과로 삼성은 2006년에 세계 TV 시장의 기준을 바꾸기에 이른다. 당시 TV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소니는 화질-소리-디자인 순서로 중요도를 정하고 출시할 제품을 의사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TV의 스피커는 전면에 배치했고, 사각형 모양의 디자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 디자이너의 생각은 달랐다. 일반적으로 TV에서 요구하는 소리기술은 시청자가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스피커 위치를 과감히 바꾸었고, 경영자가 화질-디자인-소리 순으로 의사 결정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오각형 TV를 디자인할 수 있었고, 이 모양이 와인잔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보르도라고 이름 지었다. 보르도 TV는 삼성이 반도체를 제외한 세트 제품에서 첫 번째 세계 1등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TV 모양을 바꾼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를 디자인하는 문화를 갖추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TV 시장에서 1등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아이팟 개발사례와 같이 TV 핵심기술이 브라운관 방식에서 LCD 방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해석을 했기에 가능했다. 애플과 협력을 경험한 지 불과 5년여 만에 삼성은 디자인 역량을 내재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술 구현을 담당했던, K상무는 “디자이너는 꿈을 제시해요, 그리고 내가 혁신기술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요, LCD를 만드는 사업부에 찾아가서 요구하고 오기도 하고요."라고 회고했다. 


이러한 변화는 1996년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하고 실행한 삼성 최고경영자의 의지에서 시작됐다. 이 선언 중에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이 메시지를 이해한 각 사업을 담당하는 리더들의 크고 작은 혁신적 의사결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보르도 TV를 출시할 수 있었다. 


[1] 유영진/김경묵, 2015, HBR(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삼성은 어떻게 디자인 강자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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