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스티브 잡스의 예술에 기반한 새 개념(開念)이 세상을 바꿨다. 예술은 상품이 아닌 문화를 만드는 기반이다. 그래서 선진기업들은 자신의 예술 세계에 집중한다. 이것이 제품이 아니라 좋은 상품을 만드는 (절대)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 중인 ‘개념’의 경계가 한계에 이르러 허물어지려 할 때 ‘급진적인 변화’가 다가온다. 이 급진적인 변화를 ‘혁명’이라 부른다. 그래서 혁명은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경계를 다시 세운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점진적인 변화이다. 점진적인 변화는 기존의 경계를 탄탄히 하는 과정으로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삶에 가깝다. 개념을 한자로 ‘槪念’이라고 쓴다. 그 의미는 ‘존재하는 여러 생각들 중에서 공통된 하나’라는 뜻이다. 그래서 개념은 점진적인 변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말이다. 필자는 ‘槪念’을 ‘開念’으로 바꾸어 ‘생각을 여는 것’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주도적으로 새 경계를 세웠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새 시대를 여는 새 개념(開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스티브 잡스의 새 개념(開念)이 세상을 바꿨다
정조가 수원화성과 같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생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급진성은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드러난다. ‘옛것을 배운다’는 온고(溫故)의 해석은 같았지만, 지신(知新)의 해석이 달랐다. 보통은 ‘(학습해서 남의)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라고 해석하는데, 정조는 ‘(학습해서 나의) 지식이 새로워진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정조는 지(知)를 동사로 신(新)을 명사로 읽는 일반적인 해석을 취하지 않고, 지(知)를 명사로 신(新)을 동사로 해석했다.
정조는 당시 지식 관료들이 지식은 많지만 진정으로 시대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의 부재함을 꼬집은 것이다. 그래서 이 해석은 단순히 문법을 바꿔 읽는 차원을 넘어 자신과 더불어 ‘새 시대를 열어갈 사람’에 대한 개념(開念)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정조가 터득하여 제시한 새로움을 만드는 사람의 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정조가 수원화성과 같이 아름다운 성을 디자인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수원화성 창룡문에 당시 기능인에 지나지 않았던 석수(돌을 깎는 사람)들의 이름이 관리들의 이름과 나란히 ‘석수 김명한 등 19명’과 같이 새겨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플은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Think different’라는 광고 문구를 사용했다. 이 문구는 ‘Think differently’라는 부사적 표현을 ‘Think different’라는 형용사적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명백히 문법적으로 잘못된 표현으로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그러나 애플은 다름(different)이라는 단어는 없어도 되는 부수적 부사어(differently)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적 형 용어 (different)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의 문법을 파괴한 이 문구에 담긴 개념(開念)은 혁명적이기까지 했다. 디지털 시대를 주도하려는 애플의 생각을 담기에 충분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하는 시기(1997 년~2002년)에 이 문구를 사용한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해석의 기준을 바꾼 정조와 문법의 기준을 파괴한 애플은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언어로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성과로 연결시켜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독서는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참으로 정밀히 살피고 밝게 분별하여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는다면, 날마다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외운다 한들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중략- 독서를 오래 하여 깨달은 이치가 자신의 몸속의 이치와 하나하나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참으로 터득하는 것이 있게 된다. 나는 일찍부터 이 말을 사랑하였다." - 정조 <홍재전서 162권 일득록> -
개념은 본질과 특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질은 변하지 않으려는 속성이고, 특성은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가려는 속성이다. 본질이 강조되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특성이 정점에 다가가면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서 점진적인 변화는 본질에 충실한 변화로써 상품의 처리 속도, 화면 해상도 등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급진적인 변화에서는 자율주행 자동차, 알파고, 스마트 시티 등과 같이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새로운 개념이 탄생한다. 세상에 없던 도구가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롭게 등장한 낯선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인류는 18c부터 세 번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 전반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익숙한 도구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낯선 도구를 사용하는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산업혁명의 산물인 전기에너지와 무선통신 기술 등 낯선 도구를 익숙하게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 산업혁명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예술은 상품이 아닌 문화를 만드는 기반이다
21C에 자율주행 자동차, 알파고, 스마트 시티 등 세상에 없던 급진적인 개념과 도구들이 탄생했다. 기존의 것을 학습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새로움’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창의성이라 부른다. 창의성은 새로움을 만드는 목적에 해당하는 말이다. 목적은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수단을 찾는다.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창의성을 구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가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디 (De=designare)’와 ‘사인(Sign)’의 합성어로서 ‘사인(sign)의 방향을 가리키다(designare)’는 인문학적 개념이 담겨 있다. 즉 디자인은 본래부터 인문에 기반한 ‘인문디자인’인 것이다.
또한 인문디자인과 창의경영은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다. 풀어 보면, 인문디자인은 [그림]과 같이 예술의 세계에서 얻은 영감을 ① 자신의 철학으로 개념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② 그 개념을 담은 상품을 현실화하는 과정이고 ③ 경영은 그 상품을 문화화 하는 과정으로 구분된다. 이것이 예술에서 시작해서 문화를 탄생시키는 디자인경영의 과정이다.
기업은 누구나 자기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갖고 싶어 한다. 문화가 브랜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품이 아닌 문화를 팔고 싶어 한다. 문화를 파는 것이 상품을 파는 것보다 비싼 값을 받고 안정적인 수익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은 자신이 만든 상품을 문화 화하는 데 실패한다. 예술의 세계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다시 개념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문화가 담긴 상품이 가능한데, 이 과정을 생략하거나 간과하기 때문이다. 개념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는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기업은 이를 바깥에서 빌려 쓰고 있다.
< 인문디자인과 창의경영=디자인경영>
예술 세계에 집중한 선진 기업들
새로움을 만드는 것에 익숙한 기업은 자기만의 예술(인문 중 하나) 세계를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무인양품은 ‘텅 빔’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이것으로 충분한가’라는 상품 검증 개념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이 개념을 구현시킨 도구가 디자인되었다. 애플의 아이패드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패드는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 근무하던 마크 와이저가 주장한 ‘유비쿼터스 컴퓨팅’ 개념을 구현한 첫 번째 상품이다. 마크 와이저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기술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하고, 기술이 스며들어 있고 뒤로 물러서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패드, 탭, 보드와 같은 디바이스로 구현된다”라고 하였고 애플은 이 개념을 상품화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은 새롭게 등장한 유비쿼터스 컴퓨팅 개념을 또 하나의 기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휴대할 수 있는 기술을 구현하는 과정에 집중했다. 이 개념이 예술(인문) 세계에서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한 예로 아이패드는 당시 저가 컴퓨팅 디바이스였던 넷북에 비해서도 기능과 성능이 부족했고, 가격마저도 비쌌기 때문에 경쟁 기업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패드는 출시 2개월 만에 200만 대 판매라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휴대용 컴퓨팅 디바이스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 뒤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아이패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무인양품, 애플과 같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고, 자신의 예술(인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요구된다. 이처럼 경계를 넘어서는 기업을 우리는 ‘무버’라 부르고, 처음 경계를 넘어선 기업을 ‘퍼스트 무버’라 말한다. 그들을 따라 하는 기업을 ‘팔로워’라 하고, 처음 따라한 기업을 ‘퍼스트 팔로워’라 부른다. 이것은 사람과 국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제품이 아니라 좋은상품(Goods)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상품을 디자인하는 것도 경계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개념을 넘어서서 새로운 ‘좋음’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이 가진 예술적 정체성(Identity)을 상품화했을 때 가능하다. 즉 나(I)의 정체성(Identity)을 상품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세계에서 출발하면 좋은상품(Goods)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좋은 상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술 세계가 결여된 채 기술만을 구현하는 과정(Process)을 통해 만든 상품을 제품(Product)이라 한다. 만든 과정이 담겨 있을 뿐, 상품으로써의 존재 이유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무버를 흉내 내어 팔로어가 만든 복제상품일 뿐이다.
결국 좋은 상품은 나의 정체성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 정체성이란 ‘관계 맺는 것들에 대한 나의 입장 표현’을 말한다. 따라서 정체성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맺었던 모든 관계 속에서 인식된 ‘나’ 전체가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내 정체성이다. 미래의 정체성은 나를 언어(말 또는 글)로 개념화(재구성)하고 실행(행동)하는 과정에서 바꿀 수 있다. 이 과정이 [그림]의 예술에서 영감을 얻고 이것을 다시 개념화하는 ‘생각의 개념화’ 과정이다.
우리가 오늘날의 급진적인 변화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더불어(與民) ‘익숙한’ 기술과 트렌드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과 도구의 근원을 먼저 생각하고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성’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기업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상품화하고 문화화 하는 데 자신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KIDP(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 이슈리포트 2018년 5월 Vol.2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