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퇴근하고 영화 '터널'을 보았습니다. 따끈따끈한 감상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글을 쓰고 싶어서 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이러한 장르의 영화 키워드가 '사느냐', '죽느냐'인 것을 알 것입니다. 영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어찌 보면 뻔한 전개가 이어질 수 있지만 사람들은 내심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죠.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에 접했던 정보는 '우리나라 안전 대책에 대한 문제점을 꼬집는 영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다소 음울하겠구먼.'이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관람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가벼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파가 섞여서 좀 그렇다는 얘기도 했지만 제 기준에서는 그나마 절제했던 모습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든 첫 생각은 "이정수는 죽어야 했다."입니다. '터널' 원작 소설이 있다는 정보는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매우 음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더군요. 물론, 영화로써의 흥행과 미디어가 주는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단순히 음울함으로 끝났다면, 그것도 쉽게 납득하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터널'에서 아쉬웠던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영화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우리나라 안전 체계의 비판과 정치꾼들, 기자들의 만행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장관이 와서 사진 촬영을 한다고 구조 작업이 늦어지고 1분 1초가 중요한 순간에 특종을 잡으려고 난리인 기자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근데 뭐랄까요? 매우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뭔가를 꼬집는 건 알겠는데 요즘 말하는 대로 '사이다'가 아니라 '맞아 저런 거 있지'라는 느낌입니다. 아예 행태가 너무 속 쓰릴 정도로 답답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사이다'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예정된 모습들이었습니다.
영화 '터널'은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가 매우 중요한 영화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맞이하는 감정을 최대한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영화였기 때문에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배우 '하정우'씨와 '배두나' 씨의 연기는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배두나'씨가 너무 예뻐...... 흠흠. 정말 예뻤습니다. 참 애매한 것이 너무 예쁘니까 감정이입이 잘 안 됐습니다. 영화 설정 상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는 사건이 되어야 하는데 예쁜 마누라가 있는 설정이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크흡.
하지만, 정작 중요한 연기의 틈은 조연들에게 있었습니다. '오달수'씨가 연기한 소방관 역할이 다소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영화 전반에 가벼운 분위기가 연출될 때의 '대경'은 '오달수'씨와 잘 어울렸습니다. 특유의 웃음 캐릭터로 '지금 위급한 상황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하지만, 소방관으로서의 배우 '오달수' 씨는 정의감 넘치는 역할이지만 실제 영화가 주는 상황과는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또한, 중간중간 단역으로 나오는 분들도 역할에 충분이 몰입되지 않는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기자 역할을 맡은 분과 뉴스 아나운서 역할을 맡은 분, 그리고 토론의 패널들. 마지막으로 구조 작업 중 죽은 사람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론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글 제목에도 표현한 워딩입니다. '터널'을 보며 아쉬웠던 점은 제 3 자의 입장입니다. 영화에서 조금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구조 작업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구조 작업을 펼쳤는데 정작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생명이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관객도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죠.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좀 더 구체화된 고민거리로 나오진 않습니다. 어찌 보면 정치권에서 당연한 수순으로 구조작업을 중단하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 되죠. 여기서 제가 아쉬운 건 뉴스를 접하고 구조 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제 3 자의 입장. 즉, 우리나라 대중입니다. 원작 소설을 직접 보진 않았으나 원작의 전반적인 결말을 봤을 때, 영화보다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상황 조명을 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아픈 일들이 있었습니다. 되돌릴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던 결과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가 단순히 흥행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정수' 개인의 고통과 대비한 대중을 비췄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 번 터지는 뉴스들에 무감각할 수 있고, 쉽게 타인에게 공감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들이 '어떤 연결 고리'를 갖게 된 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비리로 인한 부실 공사가 '이정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듯이 대중이 뉴스거리로 매일 정신없이 접하는 일들이 '어떤 연결 고리'하에 진행된 다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머리를 스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바로 '방황하는 칼날'에서의 세탁소 장면이었습니다. 영화를 본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누구 집 딸이 변을 당했다더라"는 소식을 세탁소 주인아주머니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접하고 남편에게 그저 흘러가는 스캔들인 듯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의 부부의 무미건조한 반응과 대비되어 나중에 사건을 터뜨린 장본인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행동이 매우 인상 깊습니다.
이런 면에서 '터널'의 제 3 자에 대한 표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같은 공간을 살아가지만 온도차가 있는 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선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지 알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죠. 그걸 매일 느끼고 산다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온도차가 아예 1차원 2차원의 차이가 날 정도로 다르다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 사람들에겐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저는 "이정수는 죽었어야 했다."라고 했습니다. 근데 그 죽음이 비관적이고 절망적으로 영화 내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뒤통수를 치는 죽음이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극한의 상황인데 어떤 웃음거리를 관객으로부터 끌어냈으니까요. 그렇지만, '운수 좋은 날'과 같은 긴 여운은 없습니다. 전반의 약간 들뜬 분위기를 순간 '멍'하게 잡아먹는 요소가 있었어야 했는데 큰 무리 없는 해피 엔딩으로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어떤 분은 "영화가 망해도 좋으니 해피 엔딩으로 끝나서 좋다."라고도 얘기하지만, 이런 경우 얼마 안 가면 잊히게 됩니다. 많은 영화들 중에 하나가 되며 어떤 의미 조차 남기기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결말이 비교되는 영화로 '베리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래 영화 '베리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베리드'는 관 속에서의 극도의 폐쇄감과 긴장감이 잘 표현된 영화입니다. 영화 내내 주인공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탈출을 위해 온갖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시도합니다. 하지만, 끝내 주인공은 죽게 되죠. 결말은 처음 말씀드린 대로 '죽느냐', '사느냐'입니다. 하지만, 영화 '베리드'에서의 죽음은 순간 '멍' 해지는 죽음이었습니다. '와. 이렇게 죽는 거야? 진짜 죽은 거야?' 이런 느낌이 듭니다. 영화 자체는 정말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다 보니 후반부에 극도로 피로한 느낌이 들지만 결말이 충격적이어서 여운이 남았습니다.
'터널' 원작에서는 이정수가 죽은 이후의 비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충격적인 여운이 남지만, 날 것 그대로 영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영화 '터널'에서는 이런 '베리드'에서의 뒤통수를 관객에게 보여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듭니다.